미군정기 <군산신문>에서 발견한 '복민의원' 이야기

광복 후 군산에 정착한 '중국 여의사'가 환자 진료를 못한 이유

등록 2024.08.07 11:38수정 2024.08.07 11:38
0
원고료로 응원
기자는 지난 2011년 '군산의 서양 의료사'를 <오마이뉴스>에 다섯 번 연재한 적이 있다. (관련 기사: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그 후에도 숨겨진 자료를 발굴, 7~8회 기사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군산 최초 개업의(정순문 씨)도 밝혀냈다. 오늘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1948) 신문 광고란에서 찾은 ‘복민의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기자말]
a  1950년대 군산 시민병원(복민의원 이후 같은 건물에 개원한 병원으로 추정됨)

1950년대 군산 시민병원(복민의원 이후 같은 건물에 개원한 병원으로 추정됨) ⓒ 군옥대관

한반도는 광복(1945)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는 그해 10월까지 약 두 달 동안 정치적 공백기였다. 미군정 시행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까지 3년은 가히 무질서한 과도기였다. 특히 전라북도 군산 지역은 물가 폭등으로 세궁민은 늘어만 갔고, 좌우익 대립으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하는 등 각종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었다. 

거리는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했고, 잡곡과 의복을 배급받아 의식주를 해결했던 1947년, 그해 4월 나운동에 80명 수용 규모의 군산애육원이 개원한다. 5월에는 국립조선해양대학이 인천에서 신영동(째보선창 부근)으로 이전한다. 9월에는 사설학원 군산동지숙(群山同志塾: 이듬해 군산대학관으로 개편)이 설립된다. 10월 15일에는 <群山新聞(군산신문)>이 창간된다. 


제헌국회 구성 전·후 군산 사회상과 병의원들 
a  1948년 3월 7일 치 <群山新聞(군산신문)> 광고

1948년 3월 7일 치 <群山新聞(군산신문)> 광고 ⓒ 조종안

위는 1948년 3월 7일 치 <군산신문> 광고란이다.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5·10 선거)을 앞두고 있던 시기로 무척 혼탁하고 어지러웠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영화 프로를 비롯해 군산청과물주식회사 설립공고, 합자회사 등기 공고, 음식점 구인 광고, 군산소주 주식회사에서 제조한 명주(銘酒) 소개, 병의원, 사진관 등 다양한 광고가 보인다. 

그 시기(1948년 3월~9월) <군산신문>에 실린 병의원은 중앙로 1가 '복민의원(福民醫院)', 장미동 경신소아과의원(敬信小兒科醫院), 미원동 영생의원(永生醫院), 명산동 구암병원(龜岩病院), 평화동 평화의원(平和醫院), 신창동 송이비인후과의원(宋耳鼻咽喉科醫院) 등. 군산의사회, 군산치과의사회, 군산도립의원 등은 정부수립 축하 광고를 실어 눈길을 끌었다. 

그중 '복민의원'은 입원실 8개와 안채가 딸린 2층 목조건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의사가 운영하던 병원이었다. 광복 후 군산에 정착한 옥풍빈(玉豊彬) 원장이 미 군정청 군산지구 사령부 군정관 로저 백(Roser Beg) 대위 알선으로 1946년 7월 1일 개원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위치는 군산부 중앙로 부청 앞(현 중앙로 1가 구 시청 앞)이다. 

전언에 따르면 병원과 안집 건물은 약간 경사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향나무 등이 심어진 일본식 정원도 있었다. 옥인영(1946년생, 옥풍빈 원장 장남) 가톨릭의대 명예교수는 "아버지는 군산에서 6년쯤 병원을 운영하다 부산으로 이사하셨다"며 "군산 해양대학교 학생들이 새카만 인디언 복장 차림으로 가장행렬 하던 모습이 어렸을 때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개원 3년 후 '의술 뛰어난 의사'로 알려지기 시작 
a  복민의원 광고(왼쪽)와 옥풍빈 원장 의사면허증(오른쪽).

복민의원 광고(왼쪽)와 옥풍빈 원장 의사면허증(오른쪽). ⓒ 조종안


신문에 실린 복민의원 광고와 1946년 6월 25일 미 군정청 보건후생국(군산지구 사령부)이 발급한 옥풍빈 원장 의사면허증이다. 중국 베이징에서 병원 운영하다가 광복 후 임신한 아내와 귀환선(LST) 타고 군산에 온 옥 원장은 면허증 발급받을 당시 다른 전재민들과 함께 군산부 전정(현 명산동)의 여관에 거주하다가 개원과 함께 부청 앞으로 이사했음을 알 수 있다. 


복민의원 광고는 원장이 의학박사임을 내세우며, 내과, 소아과, 늑막폐장내과(肋膜肺臟肺腸內科)임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입원하면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음(入院隨意: 번역기 참고)'을 홍보하고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시절은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면 병실이나 마당에 풍로(곤로) 켜놓고 밥을 해먹었을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옥풍빈1899~1971) 원장은 평안남도 중화군(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알려진다.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9년 경성의전 졸업하고, 잠시 개업했다가 1931년 3월 경성제대 대삼원(大杉原) 약리학교실과 암정전(岩井田) 내과 교실에서 연구를 거듭, 1935년 경도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 받는다. 당시 옥 원장은 <염산(鹽酸), 몰핀(모르핀) 과혈당(過血糖)의 전귀(轉歸)에 관하야>라는 논문과 부논문 6편을 제출하여 통과된 것으로 전해진다. 


의학박사 학위 취득 등 경력이 화려했던 옥풍빈 원장, 당시 그는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만큼 의술이 뛰어난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지역 의료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내 이상운(李祥云: 1917년생 중국인)은 산부인과 의사였으나 군정청이 중국 의사면허증을 인정해 주지 않아 남편을 돕기만 했단다. 환자 진료는 못 하고 간호사 역할만 했던 것. 

'복민의원' 뜻은 '주민 복지를 위한 병원' 
a  베이징 병원 정원에서 옥풍빈, 이상운 부부와 중국 간호사들(이상운 여사 자서전 표지)

베이징 병원 정원에서 옥풍빈, 이상운 부부와 중국 간호사들(이상운 여사 자서전 표지) ⓒ 조종안

일제강점기 목포, 경성, 청진 등에서 개원의로 환자를 진료하던 옥풍빈 원장은 1940년경 중국 베이징에 병원을 개원한다. 자신은 내과 아내는 산부인과 환자를 진료했던 옥 원장은 광복이 되자 아내와 톈진(天津)에서 출항하는 귀환선에 오른다. 

지루한 항해 끝에 부산항에 정박했으나 콜레라 창궐로 하선조차 못 하였다. 스피커에서 군산으로 회항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선실은 아비규환이었고, 옥 원장은 아편중독자 3~4명에게 폭행을 당한다. 진통제 놔달라는 요구에 불응하자 폭행을 가했던 것. 군산항 정박 후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자 군정관이 도립병원에 입원시켰고, 20여 일 후 퇴원하게 된다. 이후 고향(평양)에 가려 했으나 삼팔선이 그어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절박했던 시기, 부청(시청) 앞 도로 건너편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병원이 있는데 그곳에 개원하면 어떻겠느냐는 군정청 대위 제안은 행운이자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다음날 개원 허락 서류를 넘겨받고 개원하게 된다. '군산의원', '지성의원' 등의 간판도 후보로 올랐으나 '주민 복지를 위한 병원'이라는 뜻으로 '복민의원'으로 정했단다. 

"국적차별로 인한 분노와 절망, 믿음 하나로 견뎌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복민의원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고, 옥 원장은 큰 뜻을 품고, 부산에 건물을 마련한다. 그러나 한국전쟁(1950년 6월)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전쟁 발발 후 물밀듯 남하한 북한군은 7월 중순경 군산 지역을 점령한다. 그들은 옥 원장 피난 보따리를 조사하다가 의료기구가 발견되자 상부에 '부르주아 계급(자본가 계급)'으로 보고한다. 
a  인터뷰하는 옥인영 가톨릭의대 명예교수(2023년 5월)

인터뷰하는 옥인영 가톨릭의대 명예교수(2023년 5월) ⓒ 조종안


옥인영 교수는 "어머니가 중국 국적 소지자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은 그때 모두 죽었을 것"이라며 옛 기억을 힘겹게 떠올렸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친구와 부산으로 먼저 떠나고 어머니와 동생, 나는 북한군에게 끌려갔지요. 어찌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어깨에 따발총 걸친 북한군을 따라가던 기억이 생생한데요. 그때 북한군(중공군) 사령관이 마침 중국인이었죠. 어머니 국적을 확인한 사령관이 '중국 사람이, 그것도 여의사가 왜 여기서 고생하느냐'며 부산까지 통행증 끊어줘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중국인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때 죽었을 겁니다." 

옥인영 교수는 "어머니는 중국 의사면허를 인정받지 못한 데다, 부모·형제와 연락마저 끊겨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렇게 만리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 사는 딸(옥 교수 여동생) 도움으로 중국을 처음 다녀오셨다. 어머니는 국적 차별로 인한 절망과 분노, 고충 등을 믿음(신앙심) 하나로 견뎌내셨다"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참고문헌 
<군산시사>(2000), 이상운 자서전 <어머니의 노래>(2011년 이유진 지음), <동아일보>, <조선일보>(1920~1930년대), <群山新聞(군산신문)>(1947~1948), 
옥인영 가톨릭의대 명예교수(옥풍빈 원장 아들) 인터뷰
#군산의료사 #복민의원 #옥풍빈 #이상운 #옥인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2. 2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3. 3 에어컨이나 난방기 없이도 잘 사는 나라? 에어컨이나 난방기 없이도 잘 사는 나라?
  4. 4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5. 5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