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구국투쟁을 펼친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112쪽)<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미래앤, 2024)
박용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2024년 현재 9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을미의병과 똑같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항일구국투쟁, 즉 항일 독립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의견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둘째로,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런 논리면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운 의병까지 국가가 보상해 줘야 하느냐"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 교수의 이 발언은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을 임진왜란의 의병과 연결시킴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다. 이주천 교수는 서양사 전공자여서인지, 임진왜란 때의 의병에 대한 조선왕조의 포상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1592∼1598) 때의 의병 포상은 조선왕조에서 이미 넉넉히 보상했다.
"선무공신(宣武功臣, 1604 선조 37): 전공을 세운 공신(18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 벼슬 등급의 승급, 녹봉지급, 노비와 토지 지급. 사례)이순신·권율(1등 공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605): 전공을 세운 공신(9,060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하여 공훈을 기록함. 의병 출신 많음. 특별 승진, 자손에 대한 음직 혜택, 부모에 대한 봉작, 본인이나 후손의 죄에 대한 처벌의 면제. 사례)김덕수 의병장(선무원종 3등 공신)
호성공신(扈聖功臣, 1604): 왕을 모시고 따른 공신(86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 벼슬 등급의 승급, 노비와 토지 지급. 사례)이항복·정곤수(1등 공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왕을 모시고 따른 공신(2,475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하여 공훈을 기록함. 공신 총수 11,639인."(조인희, '17세기 초 임진, 정유재란의 공신 선정에 대한 고찰', <한일관계사연구>77, 2022 참조)
임란 의병에 대한 조선왕조의 포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주천 교수가 대한민국 정부의 임란의병 포상을 거론했다고 본다. 조선왕조가 넉넉히 임란의병 포상을 시행하였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임란의병 포상을 할 필요가 없다.
셋째로, 기사의 내용은 보훈부의 의견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문화예술법안심사소위의 2023년 9월 19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윤준병의원 대표발의) 의결에 대해, 보훈부가 "형평성도 간과한 과도한 특혜를 주는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밝힌 의견문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기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족이 있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481명에 불과하다. 참여자 481명도 엄격한 보훈부 공적심사를 거치면 숫자가 줄어들 수가 있고, 참여자 1명에 해당 후손 1명만이 보상금을 받기에, 많은 국가예산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다. 무슨 과도한 특혜가 주어지는 포퓰리즘 법안이라는 말인가?
오히려 보훈부가 서훈에서 형평성에 위반하는 잣대를 대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이 똑같은 항일무장투쟁이었음에도, 서훈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배제하고 있다. 보훈부는 서훈에서 2중 잣대를 대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진짜 문제이다.
2024년 3월 현재 1만 8018명 독립유공자 서훈 가운데 의병(을미의병·을사의병·병오의병·정미의병) 참여자 2722명이 서훈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을미의병(1895) 145명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오히려 특혜는 의병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런데 전봉준 등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1894∼1895)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1962년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역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를 "독립운동의 시작은 을미의병(1895)이다"라고 결정했다. 이 서훈내규를 가지고 국가보훈부는 일제의 국권침탈 사건을 을미사변(1895)으로 보았고, 독립운동의 시작을 을미의병(1895)으로 보았다. 보훈부는 이 서훈내규를 62년이 지난 지금 2024년까지 바꾸지 않고 있다. 강산이 6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연구로 인해, 1990년부터 "독립운동의 시작은 갑오의병(甲午義兵,1894)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이다."(김상기 교수의 연구에서 첫 번째로 나옴)로 바뀌었다. 동시에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이 일제의 국권침탈사건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하여 일어났고,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한 항일무장투쟁 즉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에 따라 이후 독립운동의 시작이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었다. 독립운동의 시작이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뀐 지가 30년도 넘었다. 이후 수많은 논문과 저서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보훈부는 1962년의 "독립운동의 시작은 을미의병(1895)이다"라는 서훈 내규를 지금도 묵수하고 있다.
보훈부는 129년 전의 독립운동(을미의병, 양반주도)은 인정하면서, 같은 시기 130년 전의 독립운동(2차 동학농민혁명)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불공평과 불균형의 극치이다. 그래서 국회가 입법을 통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독립유공자 서훈의 형평성과 공평성의 취지에서, 국회의 동학서훈 추진이 합당한 조치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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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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