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공무원 재직 시절, 국가 방재기관은 비상근무가 자주 있다강수량계 점검, 3~4명의 인원이 100여 개의 장비를 점검해야 했다.
오영식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던 기관은 1년 내내 당직과 비상근무가 잦은 곳이었다. 아들을 혼자 키우는 나는 당시 8살이던 아들이 잠들었을 때 혼자 사무실에 출근해 비상근무를 서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한 지역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국민의 안전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당연히 이해될 텐데, 아주 먼 지역에 호우주의보 하나 났다고 1시간 이내에 여러 명이 동시에 비상근무로 출근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비상근무'라는 용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서둘러 가보면 대부분은 하는 일 없이 인터넷 보며 시간 보내다 퇴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아들과 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그래도 소위 '잘나간다'던 국가공무원 신분을 이렇게 일찍 내려놓는데, 어영부영 대충 살지는 말자!'
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가기 전 아들과 함께 6대륙 100개국 정도는 여행해 보자.'
아빠는 스페인어, 아들은 영어 배우기
그렇게 우리 부자는 자동차 타고 3대륙, 40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아직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학업과 학교 적응 문제로 인해 매년 오랜 기간 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금 아들은 영어를, 나는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고, 2년 뒤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북아메리카부터 남아메리카까지 종단하는 장기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최근 나는 생활비를 벌 요량으로 아들이 다니는 학교 앞에서 영어학원을 차려 오후에는 아들과 또래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퇴직하고 아들 학교 앞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지금 있는 학원 2층 발코니에서는 아들이 다니는 학교 정문이 내려다보인다. 그렇게 나는 요즘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이 되면 저 멀리 쫄래쫄래 걸어오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다른 학원생처럼 아들은 나를 똑같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원생이 보지 않을 때는 서로에게 개다리춤을 추며 장난을 치는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