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쓰신 나의 혼서
정수권
여기서 잠깐, 혼서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예단(禮緞)과 함께 신부 댁으로 보내는 편지를 말하는데, 예서(禮書), 예장(禮狀)이라고도 한다. 전통혼례에서 납폐(納幣) 절차의 2번째 순서이며 혼서와 채단을 함께 보내는 의식으로 한지를 간지(簡紙) 모양으로 접어서 쓰고 겹보자기에 싸서 띠(謹封)를 두른 다음 함속 맨 위에 올려놓는다. 혼서는 시대, 지역에 따라 서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靑南 권영한 書 참조).
내용을 보면 대략 이렇다.
때는 가을입니다.
안녕하세요. 혼례의 명에 따라 귀한 따님을 며느리로 삼게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들이 장성하였으나 그동안 배필이 없었는데 이렇게 허락해 주시니 이에 조상님께 예를 드리고 삼가 절하며 납폐 의식을 행하니 살펴 주십시오.
伏 惟 孟 秋
嘉 命 許 以 令 愛 貺 室 僕 之
子 0 0 年 旣 長 成 未 有 伉
麗 加 之 卜 筮 己 叶 吉 兆 玆
有 先 人 之 禮 敬 遣 使 者 行
納 徵 義 伏 惟
尊 慈 特 賜
鑒 念 謹 宣 再 拜 上 狀
아, 순간 생전의 아버지를 대하는 듯 마음이 울컥했다. 한지에 반듯하게 쓴 처음 보는 글씨가 아버님 성품과 꼭 닮아 있었다. 둘째 아들 혼사를 위해 정성을 다해 쓰셨을 걸 생각하니 절로 옷깃이 여며졌다.
글씨를 잘 쓰다
40여 년 전 건강하게 군에서 제대했지만 갑자기 몸이 아파 대구에서 그림 그리기를 소일 삼아 쉬고 있을 때 아내를 만났다. 첫눈에 반해 사귀었고 이듬해 청혼을 하고 혼사 얘기가 오갔다. 몸이 다 낫지 않아 성치 못하니 결혼 준비는 시골의 형님과 대구에 사는 누님이 상의하여 준비를 했다.
함을 보낼 때가 되자 어느 날 아버지께서 집에 다녀가라 하시기에 고향집에 들렀더니 이 보자기를 내어 주셨다. 혼서였다. 펼쳐 보지도 못하고 품에 안고 와 지금까지 아내가 잘 보관하고 있었다.
속설에 의하면 이 혼서는 펼쳐보아서는 안 되며 죽는 날까지 꼭 간직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망설여졌던 것이다. 마치 땅속에 묻혀 있던 보물이 밖으로 나와 햇볕을 보자마자 기가 확 빠져나가 사그라 들 것 같았는데... 다행히 이번 기회에 잘 봤다고 생각하며 덕분에 혼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