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힌샘 주시경 선생한힌샘 주시경 선생
김삼웅
가람은 1891년(고종 27) 3월 5일 전라북도 익산군 산면 원수리에서 출생하였다.
변호사인 아버지 이채와 어머니 윤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 이씨다.
8세 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조혼 풍습에 따라 16세에 광산 김씨 수(洙)와 혼례를 치르고, 이 무렵 중국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신학문에 뜻을 세웠다. 이 책은 한말 위정척사파나 개화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읽혔다.
양계초의 글 중에 가람에게 충격을 준 대목은 <중국 학술사상 변천의 대세>였다.
오늘날은 단지 양대 문명이 존재할 뿐으로, 하나는 태서(泰西) 문명으로 구미 각국을 말하고, 하나는 태동(泰東) 문명으로 우리 중국에 이른다. 20세기는 곧 양대 문명의 결혼시대이다. 나는 우리 동포가 장작에 등촉을 밝히고 술을 마련해 가지고 수레로 문 밖으로 마중을 나가 신중하고도 공경한 태도로 환영식을 벌여 서방의 미인을 며느리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집안에 뛰어난 아이가 탄생하도록 하고, 이를 잘 돌보아 길음으로써 우리 집안의 대들보로 삼고 싶은 것이다.
가람은 나라가 망한 1910년 3월 스무살에 전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마련한 조선어강습원의 중등과와 고등과는 마쳤다. 그가 이 시기에 한글학자요 민족주의자 주시경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국학연구와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시조를 짓는 출발지점이 되었다.
주시경은 1911년부터 서울 박동에 있는 보성중학교에 조선어강습원(일요강습소)을 열어 한성사범학교·계성보통고등학교 등 서울의 각급 학교에서 찾아온 청년 학생들에게 일요일마다 무료로 국어국문을 강의하고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켰다. (주석 1)
가람은 20세에 국치를 당했다. 가장 열정적인 나이에 가장 불행한 망국을 겪은 것이다. 평범한 청년이었으나 주시경으로부터 민족의식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중의 청년들과는 크게 달랐다. 진로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였다.
1913년 3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 있는 남양공립보통학교와 여산의 공립보통학교 훈도(교사)로 재직하면서 전주 호명강습소에 나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우리 어문과 전통을 가르쳤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났다. 그가 살고 있는 전주에서도 거세게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해외 망명의 길을 찾았다.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이해 8월과 9월 두 차례 만주를 다녀왔다. 그리고 상하이를 거쳐 미국행을 시도했다.
스물 아홉 되던 해 기미독립선언을 듣고 서울에 와서 상해(上海)로 하여 미국으로 가려다 못 가고 어느 친구 집을 찾았다가 형사에게 끌려가 종로서에서 5, 6명 형사의 뭇발길질과 뭇매를 맞아보았다. 부모에게도 매를 맞아본 일이 없던 나로서는 이게 처음이다. 무슨 죈가? 수일 만에 나왔다. 나는 그 후 혹은 무역상과 봉천(奉天)도 두어 번 보고 후는 시골에도 가 있다 도로 서울로 와 중학교사가 되어 20여 년을 보내는 동안 나의 뜻하던 바 고서적 몇천 권을 모았다. (주석 2)
해외 망명이 좌절되고, 두 번째 만주에서 귀국한 4일만인 10월 8일~11일의 4일 만에 있었던 기록이다.
경찰서로 가자 한다.
……종로 경찰서로 들어가다. 이층 우로 끌어 안치다. 거의 어두어서 얼굴 넓은 미복한 일인 좌등이가 나를 오라고 손을 치며……네 발 달은 둥근 의자에 안치다. 성명 본적 주소 나 경녁 오날 리해동이 차저간 일 모다 뭇는다. 무르면서 적으며 적으면서 물어 이것저것 고지알개지알 성거스럽게 군다.……그러드니 십여 명이 이러나서 나잇는 데로 오다. 나를 한가운데 마루판에 끌이어 안치며 웬 안경 쓰고 박힌 사진 한 장을 보이며 '이것이 너 아니냐' 한다. 입모습은 거의 나와 같다. 얼굴 전형도 같은 듯하나 그 사진은 조금 넓다. 나는 "아니 라" 하였다. 뭇 무리가 구두발찔로 수업시 차다. 나는 "아니라"하면 그 무리는 "너라" 하며 먼저 안젓든 의자를 드러 마구 따리며 차다.……
- <가람일기>, 1919.10.8일.
……혹 도망할가 두려하여 꼭 수직하는 이 잇다. 뒷간만 가랴도 꼭 말하고 수직군 압양하여 간다. 일등일정을 저 맘대로 못한다. 경찰서를 사람들이 무서할만도 하겠다.……다시 좌등이 나를 다리고 어느 방으로 드러가서 여러 가지 머리가 압흐도록 서가 달토록 다시가 저리도록 취조하였다.……
- <가람일기>, 1919.10.9일.
주석
1> 고종석, [주시경], <발굴한국현대사 인물1>, 14쪽, 한겨레신문사, 1991.
2> 이병기, <해방전후기>, <가람문선>, 203~204쪽, 신구문화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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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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