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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신이 있었다, 나를 고무신·몽둥이로 두들겨 팬..."

[인터뷰] 강제수용시설 '천성원' 피해자 박치온씨... "언제 죽을지 몰랐던 삶"

등록 2024.09.27 07:05수정 2024.09.2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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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지역 성인부랑인수용시설(천성원)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박치온씨가 13일 오후 천성원이 운영했던 양지원(현 노아의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개미고개'에서 피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충남 지역 성인부랑인수용시설(천성원)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박치온씨가 13일 오후 천성원이 운영했던 양지원(현 노아의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개미고개'에서 피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소중한

그저 "재수가 없어서"라고 치부하기엔 울분 터지는 날들이었다.

박치온(69)씨가 청년 시절 2년을 이유도 모른 채 갇혀 지냈던 천성원(양지원·성지원을 운영했던 재단)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옥의 불구덩이"였다. 서슬 퍼런 군부정권 시절, 여인숙에서 잠을 청하던 그에게 성인 남성 4~5명이 들이닥친 게 지옥의 시작이었다.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 있던 양지원으로 끌려간 그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구타를 당하며 강제수용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옮겨진 대전 성지원에서는 자물쇠가 걸린 작업장에 갇혀 아침부터 밤까지 야구 글러브를 만들었다. 불량품이 나기라도 하는 날엔 몽둥이나 고무신으로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그나마 다리 한쪽이 없는 장애인이라 피해가긴 했지만 다른 입소자들은 '날아라 비행기' 등의 기이한 이름이 붙은 가혹행위를 수시로 당했다.

운 좋게 탈출에 성공한 박씨는 장애인 단체에 몸담으며 살아왔다. 그는 지난 13일 세종시장애인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지난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을 만나 천성원에 대해 5시간을 내리 설명했다"면서 "최근 진실규명 결정이 난 이후로는 마음이 복잡해 밤잠을 뒤척인다"고 했다.

박씨는 인터뷰 내내 미간을 찌푸리며 "그곳에 있던 '신(神)'의 이름 석 자를 들으면 미칠 것만 같다"고 했다. 신으로 통하던 그의 이름은 현재 82세의 노재중, 당시 천성원 이사장이었다. 어느덧 장년이 된 박씨가 스물여덟 청년의 눈으로 그날을 회상했다.

"항상 언제 맞을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채로 살았어요. 노재중씨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어요. 왜 나를 때렸냐고. 왜 나를 잡아갔냐고."

지옥으로 가는 문


 박씨가 13일 오전 세종시장애인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씨가 13일 오전 세종시장애인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소중한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가 "모든 걸 이뤄서 편안하게 흘러가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 치온(致穩).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박씨의 젊은 날은 편안하지 못했다.

박씨는 열다섯 살 무렵 어머니를 여의고 두 동생과 뿔뿔이 흩어졌다. 1976년엔 충남 대천에서 연탄 차 조수로 일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보상금으로 식당을 차렸지만 장사가 잘되지 않았고, 결국 목발을 짚고 수세미와 비누를 파는 거리 행상에 나섰다.


아등바등 살아도 주머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83년 11월 14일, 결국 박씨는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당숙이 있는 충남 연기군으로 향했다. 하지만 둘은 만나지 못했다. 당시 경찰이었던 당숙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 행사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조치원역 인근 여인숙으로 가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그날 양지원으로 강제 연행됐다.

"여인숙에서 자고 있는데 난데없이 빨간 모자를 쓴 성인 남자 4~5명이 저를 끌어내더라고요. 탑차 뒷문을 열고 저를 강제로 집어넣었는데, 그 안에 사람들 3~4명이 타고 있었어요. 근처 파출소에 도착했는지 잠깐 탑차 문이 열렸어요. 경찰관들이 사람들 숫자를 세더니 '4명', '5명'도 아니고 '4개', '5개' 이렇게 말하더라니까요. 저희가 개, 돼지도 아닌데.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물으니 누가 옆에서 '양지원'이라 그러더라고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이전엔 양지원·성지원이 뭔지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 곳인 줄 알았다면 도망갔을 거예요. 끌려갈 당시에는 연행인지 뭔지도 몰랐으니까 그냥 어리둥절해서 갔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저를 잡으러 왔던 남자들은 부장 직원 1명, 그리고 모두 저와 같은 원생들이었어요."

'신'과 마주한 날

 청년 시절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박씨는 의족을 착용한 채 생활하고 있다.
청년 시절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박씨는 의족을 착용한 채 생활하고 있다.소중한

양지원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그날 열린 탑차 뒷문은 지옥으로 가는 문이었다는 것을. 캄캄한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한 양지원엔 건물 하나와 군대식 막사가 보였다.

"양지원 총무가 밖으로 나왔는데 그곳 사람들이 무슨 대통령을 본 것처럼 다들 거수경례를 하더라고요. 군인도 아닌데 말이에요. '저 사람이 누구길래 충성하지?' 궁금했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았어요.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도 가늠이 안 됐으니까요. '사무실에 들어가라'기에 들어갔어요.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적게 하더라고요.

책상에 서무가 앉아 있었는데 그 사람도 원생이었어요. 그 사람이 '여러분이 오늘 입소했으니까 일주일 안에 집에다 서신을 보낼 것'이라면서 '집에서 확인 절차가 오면 여러분은 귀가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어요. 저는 당숙 집으로 서신을 보내달라고 했죠. 나중에 탈출하고 보니 거짓말이었어요. 당숙 집에 서신은 보내지도 않았어요. 이 XX들."

양지원에서 두어 달을 있었다. 그곳에선 군대에서 쓰는 '중대', '소대'란 표현을 썼다. 원생들은 1개 중대에 6개 소대로 나뉘었다. 대부분 20~40대 남성들이었다. 박씨는 '장애인 소대'라고 불리는 '6소대'로 보내졌다. 소대원의 절반은 박씨처럼 신체 장애를 가진 이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정신 질환이나 간질 등을 앓는 이들이었다. 그즈음 박씨는 노재중을 처음 봤다.

"어느 날 '노재중씨가 처음으로 6소대를 방문할 것'이라고 했어요. '높은 사람이 온다'는 말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노재중씨가 저를 쳐다보더니 이름을 묻더라고요. 며칠 지나 사무실에서 저를 불렀고 '박치온이는 대전에 있는 성지원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가면 의족을 맞춰줄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제가 의족이 없었거든요. 또 탑차에 타라길래 탔죠. 저를 포함해 여러 명이 성지원으로 향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속으로 '노재중씨가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분인가 보다' 했어요."

박씨의 생각은 성지원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강제노역이 시작됐다. 식사는 "밥과 멀건 소금물, 김치 쪼가리"가 나왔다. 그나마도 "간부들이 먹고 남긴 돼지족발 물 같은 게 있으면 고마운 일이었다"고 했다. 박씨는 "그곳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야구 글러브를 제작했는데 실수로 불량품이 나오기라도 하면 구타가 이어졌다"면서 "탈출하기 전까지는 임금도 받지 못 했다. 월급이라곤 매달 나오는 담배 5개비가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성지원 내 7층짜리 원명학교 건물에서 먹고 잤어요. 원생들이 나갈 수 없게 바깥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어요. 그곳 6층이 작업장이었는데 나무 바닥에 담요 하나 덮고 자고, 또 일어나서 일을 했죠.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요. 오전 6시에 기상하고 7시에 지하실로 내려가서 아침밥을 먹어요. 그리고 작업장으로 올라가 '작업 시작하라'는 작업반장의 말에 밤 10시까지 일했어요. 손이 찢어지고 여기저기 부르텄어요. 일 잘하는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작업하면 하루에 18~20개를 꿰맬 수 있었어요.

일요일엔 말이 쉬는 거지 쉬는 게 아니었어요. 7층에 있는 대강당으로 올라가서 교회에서 온 목사님, 전도사님의 설교를 들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일했으니 원생들이 졸잖아요. 졸거나 자면 '왜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는데 자냐. 짐승만도 못 한 XX들아' 소리를 들으며 양지원으로 보내지는 거예요. 평일에 작업장에서 불량품이 나와도 양지원으로 보내졌어요. 성지원에 있을 때는 '양지원으로 보낸다'라는 말이 되게 두려운 말이었거든요."

교육이란 이름의 구타

 박씨가 13일 오전 세종시장애인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씨가 13일 오전 세종시장애인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소중한

박씨 역시 양지원으로 여러 번 보내져 '정신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구타를 당했다. 박씨는 가장 많이 폭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노재중을 떠올렸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인물.

- 양지원에서의 '정신 교육'은 어떤 식이었습니까.

"2~3일 연속 잠을 재우지 않는 거예요. 일주일 내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작업하니까 몸도 고단한데 잠도 안 재우는 거죠.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러고는 연병장으로 나가서 온갖 가혹행위를 겪는 거죠. 우선 '날아라 비행기'라고 바닥에 엎어져서 양손으로 뒷발을 잡고 가슴으로 언덕을 오르는 게 있었어요. 올라야 하는 언덕이 경사가 40도 정도 됐죠.

'김발 말이'는 사람 여러 명이 동그랗게 겹쳐 누운 뒤 굴러가는 거예요. 잘못 굴러가면 갈비뼈가 다 부러지는 거죠. 그나마도 저는 다리 한쪽이 없는 장애인이잖아요. (날아라 비행기, 김밥 말이 말고) '원산폭격' 같은 훈련을 주로 받았어요. 양팔을 뒷짐 지고 대가리(머리)를 땅에 박고 머리랑 다리로만 몸을 지탱하는 거요. 옆에 있는 간부들이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훈련을 받다 힘이 들어서 낙오되면 뒤지게 맞고 간신히 다시 이어가는 거예요. 얼마나 악랄해요."

- 주로 누구에게 맞았습니까.

"양지원에 있는 교육소대 담당자랑 노재중씨요. 저는 노재중씨한테 특히 많이 맞았어요. 키는 저보다 조금 더 컸고 머리는 홀랑 까진 대머리였는데 그렇게 사람을 잘 때렸어요. 노재중씨는 하얀 고무신을 잘 신고 다녔어요. 그걸 벗어서 제 손바닥, 얼굴, 목, 등짝... 이곳저곳을 다 때렸어요. 며칠 있다가 또 와서 몽둥이로도 때리고요. 지금도 말하면서 너무 분하고 치가 떨려요."

- 반항할 생각은 못 했나요.

"제가 다리를 다치기 전 직장인 씨름선수 생활을 3년간 했거든요. 남들이랑 똑같이 먹어도 힘이 몇 배는 좋은 편이었는데도 그럴 생각은 하지도 못 했어요. 그곳에서 노재중씨는 신이었으니까. 신을 어떻게 건드려요. 노재중씨 옆엔 항상 간부가 딱 붙어있었어요. 그 사람은 악마라고요. 악마."

- 또 기억 나는 노재중씨의 만행이 있나요.

"작업장에서 일반인 원생이랑 장애인 원생이 일을 하고 있으면 종종 높은 사람들이 견학을 오기도 했어요. 하루는 노재중씨가 견학 온 사람들한테 작업장에서 일하는 저희를 보여주면서 '장애인들이 여기서 1년, 2년 일하면서 상태가 좋아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거예요. 자기가 다 고쳐낸 거라고. 본인이 영웅이라고. 그런데도 저희는 아니라고 말을 못 해요. 그곳에는 일종의 지침 같은 게 있었거든요. '눈이 있어도 보지 말 것, 귀가 있어도 듣지 말 것, 입이 있어도 말하지 말 것'이라는 지침이요. 셋 중에 뭐 하나라도 걸리면 바로 양지원으로 가서 또 맞아 죽는 거예요."

노재중에 대해 이야기하던 박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그 사람 이름 석 자만 나오면 여기가..."라며 답답하다는 듯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연신 내리쳤다.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사는 거예요. 언제 맞을지, 언제 (쥐어) 터질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바깥에서 햇빛 보고 왔다 갔다 하는 그게 천국인 거예요. 양지원·성지원 안에서의 삶은 지옥이에요. 죽고 싶었죠. 그런데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어요. 감시하는 사람들이 옆에 딱 붙어 있기 때문에."

두 번의 탈출

 진실화해위가 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중구 대회의실에서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 관련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
진실화해위가 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중구 대회의실에서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 관련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소중한

박씨는 비가 오는 날이면 작업장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집에 가고 싶다',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 마음이 한두 번 드는 게 아니었지만 '나간다고 해서 마음대로 나가질까?', '바깥에 자물쇠를 다 채워놨는데 어떻게 나갈 수가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자물쇠로 잠겨있던 작업장 문이 물건을 옮기는 새에 조금 열려 있었다. 입소 후 1년쯤 지났을 때였다. 박씨는 처음으로 탈출을 결심했다. 박씨를 포함한 열댓 명이 열린 문으로 뛰쳐나갔다. 곧이어 뒤에서 호각 소리가 들렸고 성지원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다리 한쪽도 없는데 어쩌다 탈출한 거냐"는 호통이 쏟아졌다. 다시 작업장으로 끌려갔다. 탈출을 시도한 사이 "나 때문에 불량품이 많이 났다"며 또다시 양지원으로 끌려갔다. 구타가 이어졌다.

입소 2년이 지났을 때 박씨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날도 작업장 자물쇠가 열려있었다. 밝은 대낮에 탈출에 성공하고 하늘을 보니 숨이 확 트였다. 이번에는 기억하고 있던 동생의 전화번호로 연락해 동생이 직접 그를 데리러 왔다. 보호자가 나타나니 성지원에서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못 했다. 동생과 함께 버스를 타고 조치원역으로 향했다.

성지원 측은 탈출할 때 그가 입고 나온 군복과 군화를 문제 삼아 박씨를 절도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그나마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박씨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40년 만에 '그날들' 진술했다

 박씨가 13일 오후 양지원(현 노아의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개미고개' 인근을 지나며 피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씨가 13일 오후 양지원(현 노아의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개미고개' 인근을 지나며 피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소중한

탈출 이후 박씨는 여러 장애인 지원 단체에 몸담았다. 현재는 한국장애인기업협회 세종지부장으로 일하며 지역에 있는 장애인들의 직업 훈련을 돕고 있다. 하나뿐인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40년이 흐른 지난 4월의 어느 날. 처음으로 박씨에게 양지원과 성지원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묻는 사람이 나타났다. 진실화해위 조사관이라고 했다. 진실화해위는 박씨 면담을 비롯한 대대적인 조사 끝에 지난 9일 충남 천성원(성지원·양지원)과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경기 성혜원 등 성인부랑인수용시설 4곳에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저는 진실화해위가 어떤 곳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 조사 신청을 한 건 아니지만, (진실화해위에서 먼저 저를 알게 돼)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어요. 조사관과 사무실에서 만나 5시간 동안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놨죠. 그 후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어요. 애들 소풍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더라고요. 관련된 뉴스가 TV에서 나오면 눈을 못 떼요."

인터뷰를 마친 뒤 박씨와 함께 옛 양지원(현 노아의집)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박씨는 시내 곳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처음에 내가 끌려갔던 여인숙이 있던 자리다", "이 도로는 양지원에 있던 원생들이 포장 작업을 했던 길이다"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양지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개미고개에서는 잠시 차에서 내리더니 "죽은 원생들을 이곳에 묻었다고 들었다"라고 했다.

양지원 입구에 다다르자 박씨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이전에 없었던 건물이 많이 생겼다"면서도 사무실로 쓰이던 건물, 욕실, 빨래터, 교육(구타) 받던 장소에 관해 설명했다.

"지금 가장 바라는 건..."

 박씨가 13일 오전 세종시장애인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씨가 13일 오전 세종시장애인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소중한

박씨는 노재중을 만나면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지금도 그 안에서의 2년이 생생해요. 그때만 생각하면 증오가 자꾸 치밀어 오르는데, 노재중씨를 만나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어요. 왜 나를 때렸는지, 왜 나를 잡아갔는지. 노재중씨랑 그 일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 피를 빨아먹고 돈을 번 거예요. 노재중씨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사과입니다."

그는 이런 부랑인수용시설을 운영할 근거(내무부 훈령 410호)를 준 국가를 향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얼마나 억울한지 몰라요. 20대 청춘의 2년이란 그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요? 갇혀있던 날들을 하루당 얼마로 환산할 수 있나요? 물론 진실화해위가 그동안 이 사건을 파헤치고 조사하느라고 수고들 많이 했지요. 그러나 저는 아직 진실규명이 100%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 시작이니까 국가가 나서서 끝까지 조사했으면 좋겠어요. 노재중 일가는 사회복지 사업을 못하게 하고, 사회복지 사업을 하는 기관들을 국가가 정기적으로 점검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박씨는 "아직 진실화해위 조사 신청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향후 피해자 조사나 또 다른 구제 신청이 있다면 신청할 생각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기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접할 과거 입소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같은 사람들이 모였으면 좋겠어요. 전국에 얼마나 많이 남아 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 봤으면 좋겠어요. 저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그렇게 수백, 수천 명이 모이면 상황이 달라질 거예요. 국가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겁니다. 입소하셨던 분들, 언제든 제게 연락해 주세요."

취재 요청에 노재중 "하고 싶은대로 해라"

 진실화해위가 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중구 대회의실에서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 관련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상훈 상임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진실화해위가 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중구 대회의실에서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 관련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상훈 상임위원이 발언하고 있다.소중한

천성원은 지금도 병원 2곳과 특수학교 등 15개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당시 중책을 맡았던 노재중의 일가는 지금도 이사장직 및 산하 시설의 원장직을 맡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천성원 측과 노재중에게 전화를 걸어 입장을 물었다. 천성원 측은 지난 23일 강제수용, 가혹행위, 강제노역에 대한 질의에 "너무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 현재 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분이 없다"고 답했다. '최근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에 대한 입장을 묻는 말에는 "특별히 답변드릴 만한 내용이 없다"고 했다.

노재중 역시 24일 전화통화에서 '과거 입소자들의 증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말에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후 질문을 정리해 카카오톡 메신저로 전달했으나 확인 후 답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비 오면 시체가" 부산뿐 아니라 전국 곳곳 '형제복지원' https://omn.kr/2a4ap
#천성원 #양지원 #성지원 #노재중 #양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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