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원 작가설치 작업을 끝낸 후 작품을 바라보며
박혜원
- 오랫동안 설치 미술을 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평면적인 형태의 회화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 '설치 작업'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설치 미술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공간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흔히 보는 작품들은 캔버스 같은 평면을 활용한 겁니다. 설치 미술은 평면 작품들과 달리 공간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예술 분야입니다."
- 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다음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제가 한창 공부하면서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할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쪽머리를 하셨던 분이에요. 그래서인지 머리카락을 이용한 작업에 관심이 생겼어요. 인조 머리카락을 구해서 인형을 만들어 보곤 했죠. 그때의 작업은 지금과는 좀 다릅니다. 하지만 그때의 작업이 계기가 된 건 사실이에요.
영국에서 첫 전시회를 한 후 한국에 돌아왔어요. 미술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어유치원에서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뽕잎과 누에를 보다가 소름이 돋았어요. 실을 뽑아낸 다음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던 누에가 다시 살아나오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유치원을 관두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실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 빨간 실을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아요. '여우비', '한 평의 집', '세한도' 등 여러 작품에서 빨간 실이 눈에 띕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대개 빨간 실은 '인연의 실', 혹은 '관계의 실'로 불립니다. 제게 빨간 실은 혈연이나 피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각적으로도 빨간색이 매우 강렬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듭니다."
- 집의 골조를 만든 다음 빨간 실로 감는 작업을 자주 선보이십니다. 작가님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또, 집에 붉은 실을 감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저한테 집은 단순히 하우스(house)나 홈(home)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개념입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 자궁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은 왕이나 황제가 사는 집을 '궁'이라고 부르는데요, 예전에는 일반 집에도 '궁'이라는 글자를 썼다고 합니다. 인간이 잉태되는 첫 집인 '자궁'과 사람이 사는 집인 '궁'이 결국은 연결된 거죠. 저한테 집은 사람이 태어나 살고, 또 죽는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곳입니다. 집은 삶과 죽음이 있는 공간인 거죠."
- 그렇다면, 인생은 엄마의 집, 즉 자궁에서 태어나, 우리가 흔히 '집'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살다가, 무덤이라는 또 다른 집으로 가는 여정이군요.
"네,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요. 집의 골조에 붉은 실을 감는 이유를 물어보셨는데요. 첫째 아이를 가진 후 자궁에 엄청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혈관들이 그곳에 모여있는 느낌이 든 거죠. 그런 느낌이 집에 실을 감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얻는 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누에를 보고 영감을 얻은 적도 있습니다. 여자 작가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하는 게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한테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임신과 출산, 생명의 탄생 같은 데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그림, 말, 행동에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아이들은 웬만한 예술가보다 훨씬 창의성이 뛰어난 것 같아요. 아이들이 가진 그런 매력 때문에 어린이를 위한 전시 프로젝트를 종종 진행합니다. 사실 어린이를 위한 전시는 모두를 위한 전시입니다. 부모들도 함께 오거든요. 가족을 위한 전시, 사람과 삶에 대한 전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