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쉰재 (임실읍 성가리에서 신안리 넘어가는 고개)
이완우
신안리(新安里) 정촌(程村) 마을에 도착하였다. 신안리의 정촌, 낙촌과 금동 마을은 백이산 기슭에 자리 잡고, 마을 앞에는 너른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신안리의 신안(新安)은 주자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중국 남송 주희(주자, 1130~1200)의 고향에서 지명을 따왔다. 신안리 앞에는 낙천이 흐르고, 백이산에서는 구곡천(신안천)이 흐른다.
이곳 신안리의 여러 마을 지명도 유교적 관점으로 해석되어서 특별하다. 이 지역에 살아온 유림 선비들은 이곳을 유교적 이상향으로 삼고자 했나 보다.
정촌 마을에서 낙촌 마을을 거쳐 금동 마을까지 걷는다.
정촌 마을에서 한참이면 낙촌(洛村) 마을에 이른다. 이곳의 정촌과 낙촌 두 마을은 중국의 낙양에 살던 성리학과 양명학의 원류로 알려진 정호(1032~1085)와 정이(1033~1107) 형제를 의미하여 정자동이라고도 했었다.
낙촌 마을을 지나 금동(琴洞) 마을에 도착하면 마을 높은 곳에 신안서원의 은행나무가 눈에 띈다. 신안서원에는 주희가 모셔져 있는데 원래 낙촌 마을에 있다가 이곳 금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곳 금동 마을에서 공자가 거문고 배우는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공자가 서른 살이 되어 거문고를 배웠다. 공자는 한 곡을 배웠고 열흘 동안 그 한 곡만 연주했다. 거문고를 가르친 사람이 새로운 곡을 배우라고 권했다.
'이제 악보는 그런대로 알지만, 익히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소' 하며 공자는 며칠 그 한 곡을 계속 연주했다. 그리고 '이제는 익히는 방법은 터득했으나, 이 곡에 깃든 감정과 의미를 깨닫지 못했소' 하며 또 며칠을 더 그 곡을 익혔다.
공자의 거문고 소리는 이제 정교하고 아름다워졌다. 그러나 공자는 '아직 알 수 없는 게 있다'며 거문고 한 곡 배우는 데서 스스로 거듭 이치를 깨달아 나갔다. 학문과 배움에 이르는 진정한 길을 시사하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