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돔히로시마 원폭돔
전경림
2019년 우연히 나가사키를 다녀온 이후 그의 삶도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사회문제에 약간 관심이 있는 약사로 살아왔는데, 현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족하지만 좋은 활동가 혹은 운동가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특히 2023년 5월 그가 속한 대경전단협(대구경북전문직단체협의회)에서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에 다녀왔다. 대경전단협이란 2010년에 대구경북지역의 인의협, 건약, 건치, 민변, 민교협과 대사연 6개 단체가 모여 만든 것인데, 보수화되는 대구에서 여러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서 피폭당한 한국인들은 총 10만 명이었는데, 그중 합천 사람은 70-80%를 차지하는 7-8만여 명에 달했다.
"저희에게 말씀해주신 관장님은 일본에서 피폭당한 1세대로, 폭심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살아 한국 정부로부터는 보상을 받지 못했고, 당시 일본 정부에서 준 피폭 수첩이 있어서 그걸로 약간의 지원을 받아왔대요. 그런데 문제는 약간의 지원마저 1세대만 지원되고 그 후손인 2·3세대에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2·3세대에게 지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피폭당한 피해자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자신만이 아니라 후손들이 더 큰 낙인이나 차별과 배제를 당하는 이중·삼중고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본인이 피폭당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대요. 물론 피폭당해서 눈에 보이는 장애나 육체적인 피해를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식에게 유전될까 봐 걱정할 수밖에 없었죠. 또한 유전으로 발현되지 않았어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순간 후손들의 결혼이나 취업 등에 방해될까 봐, 그들이 자신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까 봐 많은 사람이 결국에는 한국에서 '피해자나 피폭자'라고 말하지 못했대요. 평생 죄책감이나 짐을 가지고 살아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오히려 숨겨야 하는 상황이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했대요. 최소한 피해자임을 드러내야 정부에 지원을 요구할 텐데, 싸울 수도,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거죠."
나가사키, 합천 그리고 청도 삼평리
전경림은 2024년 8월 히로시마에 가기 전인 6월 11일 밀양에 연대하러 갔다. 밀양 행정대집행 10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대구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은 청도 삼평리를 들렀다가 다시 밀양에 모였는데, 그때 전경림은 깜짝 놀랐다. 삼평리에서도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길고 외로운 싸움이 있었는데, 전경림은 그곳을 '대구에서도 먼 지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도 삼평리가 저는 엄청 먼 지역인 줄 알았는데, 헐티재를 넘으니 바로 삼평리였어요. 저는 헐티재 넘어서 자주 간단 말이에요. 도대체 청도 삼평리가 어디에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세상에 우리가 자주 다니던 '드라이브길' 거기가 삼평리더라고요.
저는 오랫동안 싸우는 삼평리 할머니들이 '의지가 굳은 투쟁가'라고만 생각했어요. 어떻게 저런 의지를 지켜올 수 있을까를 생각했죠. 그 할머니는 송전탑 공사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동체 바깥으로 배제되었대요, 왕따가 된 거죠. 코로나 때 마스크를 받으러 시내에 가거나 모내기할 때 물을 대주고 시내에 농약이나 볍씨를 받으러 갈 때 할머니들이 나가기 힘드니까 보통은 이장님이나 젊은 분들이 대신 받으러 가거나 차에 태워주는데. 이분들은 그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왔던 할머니가 낙락장송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매일 힘들고 고민하는 너무 평범한 할매더라고요. 저라면, 저는 싸움을 포기하고 공동체에 다시 들어갔을 것 같거든요."
그날 전경림은 투사가 아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던 주민으로서 한 할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배제되는 순간의 서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본인에게는 아름답고 한적한 드라이브 길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몇십 년을 싸우고 버텨야만 하는 투쟁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고 했다.
5년 후 다시 히로시마로
5년 전 가벼운 마음으로 갔던 나가사키와 올해 다녀온 히로시마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또한, 왜 그는 다시 히로시마에 다녀왔을까?
"코로나 때문에 이 행사를 못 하다가 8월 히로시마에 갈 때 저희 회원들을 설득해서 함께 갔거든요. 제가 느꼈던 일본의 보건의료 선생님들과의 연대감이나 피폭의 문제점 등을 다른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이번에는 사전 세미나를 많이 했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되었죠. 인하대 최규진 선생님이 민의련을 소개해주었고. <방사선피폭의 역사>와 후쿠시마 원전 노동자를 다룬 <최전선의 사람들>, 오에 겐자부로의 <히로시마 노트>를 함께 읽었어요. 이번에는 이분들을 만나기 전에 조금 더 이해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준비를 해 간만큼 히로시마는 5년 전의 나가사키와는 달랐는데, 특히 피폭자들의 증언만큼이나 그들을 치료했던 민의련 소속 후지와라 선생의 강의가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피폭된 고아로 살아온 분의 증언을 들었어요. 부모님이 사망하고 언니와 본인이 살아남아 지금은 피폭자 상담소를 운영하는 분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실제로 그분들을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도 참 좋았어요. 선배로부터 환자를 볼 때 피폭된 후 일본 사회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조폭이 되거나 강도가 되는 분들이 많은데. '왜 저렇게 사냐고 묻고 비판하기보다는 이분들의 배경이나 피폭 이후의 삶을 한 번 더 고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이 참 감동을 주었어요. 현재의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피폭자들이 평생 어떤 배제와 차별, 낙인을 받아왔는지를 고민하고, 왜 국가나 사회에서 지원을 받지 못했는지를 고민하면 현재 피폭자의 아픔과 상처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전경림은 한사코 본인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겸허하게 말했다. 나가사키, 합천, 밀양, 삼평리 그리고 후쿠시마 등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목격한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현장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을까?
"예전에는 쉽게 판단했던 문제를 이제는 쉽게 말하기 어려워졌어요. 히로시마에서는 나가사키에서 너무 쉽게 던졌던 질문을 고민하게 되었고요. '왜 피폭자들은 반핵운동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어쩌면 폭력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피폭된 몸으로 오랜 시간 싸워 피해자나 희생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의 투쟁도 의미가 있지만, 반대로 '왜 넌 당사자인데 안 싸워?'라고 묻는 것은 타당한 질문인가. 처음에는 싸우지 않는 분들이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제삼자인 우리가, 내가 그분들에게 던지기엔 너무 폭력적인 질문이 아닌가. 우린 그분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등을 고민하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활동가나 운동가도 아니고, 현장에 가서도 이분들을 그저 짧은 시간 관찰한 정도가 다예요. 그래서 저는 '탈핵 잇다' 인터뷰를 하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죠. 근데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5년 전 나가사키를 갔을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렸고, 내년에도 다시 나가사키에 꼭 가려고요. 제가 대표로 있을 때 최대한 많은 회원과 가서 이야기도 듣고 또 민의련 선생님들과 어떻게 우리가 연대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보려고요. 두 번째로 가는 나가사키이니 느낌이 다르겠죠. 제가 받았던 고민이나 감동을 다른 회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요."
현장과 사람들을 잇는 연결고리, 씨앗 그리고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