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고남산 아래 부절 마을 앞 갓바위
이완우
이 바위는 조선 시대에는 천대 받았다고 한다. 풍수에 능했다는 문신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두 번에 걸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한번은 이서구가 이곳 갓바위 앞을 지나다가 부채를 펴 자기 얼굴을 가렸다 한다. "저 바위는 천한 기생을 나게 하는 기운이 있어서, 내가 얼굴을 가리는 것이네"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비천석(婢賤石)'이라 하며 천시했다는 얘기다.
이서구가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남원 수지면 홈실 마을 앞 산줄기 높은 봉우리인 호두산(虎頭山, 775m)을 견두산(犬頭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두산' 때문에 남원 고을에 호환(虎患)이 심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후에는 견두산에 들개들이 많아져서 사람을 해치는 등 피해가 많아졌단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원 고을의 광한루, 홈실 마을과 고평 마을에 호석(虎石)을 세워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애매한 이유로 기상이 출중한 호두산이 들개 수준의 견두산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남원은 예로부터 백두대간의 당찬 기상을 내려받은 고을이었다. 조선 시대에 남원부는 역모나 변란과 관련되었다며 세 번(1739~1748년 기간, 1844~1853년 기간, 1869년)이나 현(縣)으로 강등되거나 고을 관장인 남원 부사를 현감으로 낮추었다.
남원부 고을이 현으로 거듭 강등되며 수모를 당하는 시대에 이서구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번 역임한 바 있다. 그가 풍수적 관점을 내세워 남원 고을의 기상을 억누르려 했다고 추론한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인 걸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남원 부절 마을 앞의 갓바위는 고남산 아래 호암(虎岩)으로 불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선 개국 역사와 설화를 간직한 당차고 성스러운 산 고남산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고남산 아래 중절 마을은 당산 소나무 숲이 명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