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마산 국립3.15민주묘지.
윤성효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났던 1960년 3‧15의거 당시 행방불명되었다가 그해 4월 11일 창원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던 김주열(1943~1960) 열사의 시신을 처음 발견해 인양했던 어부 고(故) 김경영(1896~1965)씨가 국가에 의해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지만 아직 국립3‧15민주묘지에 묻히지 않아 관계 기관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회장 김창호)‧열린사회희망연대(공동대표 이순일 등)는 최근 고 김경영씨 유족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국립3‧15민주묘지관리소에 문의했다며 2025년이 4‧19혁명 65주년인만큼 4‧19 유공자에 대해 국가보훈처가 제대로 기릴 수 있도록 절차가 필요하다고 19일 밝혔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 인근에서 경찰의 요청으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최초로 인양했던 어부 고 김경영(당시 67세)씨는 시신 인양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1965년 6월 9일 사망했다.
고인은 당시까지 마산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온 평범한 어부였다. 그런데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인의 딸 김금이(74)씨는 "인양 당시 아버지는 손으로 시신을 잡으셨다 하고, 살점이 떨어져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다"라며 "이후 주무시다가도 '살, 살' 하시거나 '김주열이가 부른다'면서 악몽을 꾸시기도 했다"라고 증언했다.
당시 태풍으로 배마저 잃게 되자 생계가 막막했던 고인은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경영씨는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부근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김금이씨는 "아버지는 당시 김주열열사 시신인양지 바닥에 누워 계셨고 집으로 모시고 왔지만 이미 숨을 거둔 상태이셨다. 의사는 심장마비로 진단했다고 전해 들었다"라고 기억했다. 아버지 사망 이후 어머니는 충격으로 3년 뒤에 갑가지 돌아가셨던 것이다.
당시 언론은 김경영씨의 고통을 보도하기도 했다. 1943년 3월 15일 <조선일보>는 고인에 대해 "4월 혁명의 신호탄이 된 고 김주열 군의 처참한 시체를 바다 속에 건져낸 가난한 고막잡이 어부 김경영 노인은 해마다 3‧15만 되면 그 날을 잊지 못해 의거 기념식과 추도식장 한 모퉁이에 나타나 남몰래 김주열 군의 영령을 위로한다"라고 해놓았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민들은 "김주열 살려내라"고 외치며 거리 시위를 벌이는 이른바 4‧11민주항쟁(제2 3‧15의거)이 일어났고,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이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고 '독재'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지만 그 시신을 인양했던 어부의 가족들은 불행해지거나 고통 속에 살아왔다. 가족들은 박정희정부 때 대통령 표창장과 메달을 받기도 했지만, 표창장은 불태워졌고 메달은 없어진 상태다.
이에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2022년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권찬주) 등과 함께 김경영씨에 대한 진실규명이 필요하다며 나섰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23년 11월 진실규명 결정을 했던 것이다.
진실규명 과정에서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고인의 유족을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 사업회는 "시신 인양작업이 4월 혁명에 끼친 영향과 이후 그 개인과 가족들의 삶이 불행해졌다는 점에서 합당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진실화해위는 김경영씨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정부와 지자체에 명예회복과 선양사업을 권고했다. 유족들은 고인을 국립3‧15민주묘지로 이장을 원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국립3‧15민주묘지에는 59명이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