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야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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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원(jwparkkcc)등록 2000.10.18 21:08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 자리가 있어서 앉으면 본전이고 못 앉으면 그날은 내게 있어서는 재수없는 날이다. 특히 서 있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만 안 내리고 옆에 사람들은 다 내릴 때의 그 심정은 정말 무어라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분통이 터진다. 나보다 훨씬 늦게 탄 사람이 타자마자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면 부러움의 도를 넘어 나한테 짜증이 난다. 아줌마가 완전히 다 됐다.

술을 먹은 다음 날(아줌마가 술을 먹다니…) 출근시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게 오늘이다. 신림동에서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버스를 탔다. 딱 올라서자 마자 버스 안을 살피니 역시 자리는 없고 한 서너 사람이 서 있었다. 일단 눈치를 ‘싸악’ 살폈다. ‘음… 이 아줌마는 자는 걸 보니 한참 갈 거 같고… 저 남자는 차려입은 폼새가 대기업 스타일이니…. 한강대교는 건너겠군. 어라, 웬 고등학생? 이 시간에 학교에 가는 학생은 학교가 이 근처일 것이다. 왜냐, 지금이 등교 평균시간 즈음이니까. 쟤 앞에 서야지 역시 나의 잔대가리란…큭큭큭’

잽싸게 그 애 앞으로 섰다. 순간, 그 졸던 아줌마는 정거장을 지났는지 후다닥 뛰어 내리고 눈 깜짝할 사이 빈 자리는 이미 남의 자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는 고등학생 앞에 섰다. 그런데 고등학생은 날 배신한 채 정거장이 지날수록 깊은 잠에 빠져들고 다른 자리는 계속 새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니가 어디서 내리는지 한 번 보자’오기가 생겨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 학생의 고개는 점점 바닥을 향해 한없이 꺼지고 어느새 그의 숙인 빡빡 머리에는‘저, 야간 다녀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래… 너, 야간이지…. 웬일인지 도로는 계속 막히고 거의 한 시간 동안‘저, 야간 다녀요’라는 글귀를 눈이 빠지게 읽었다. 학생은 내가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난 한 정거장이지만 그래도 앉았다. 계속 내 머릿속인지 가슴속인지에는 ‘그래 너 야간이다’는 말이 되풀이 됐고 그러는 사이 그는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다.

버스가 조금 움직이자 신호등에 걸렸다. 어디서 보던 뒤통수가 보였다. 그 학생이었다. 아뿔사, 학교는 안가고 오락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순간 야간이라고 생각한 나를 반성했다. 청소년을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애가 왜 학교엘 안가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집 동네를 멀리 떠나 오락실엘 들어가는지…. 아직도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아예 그 학생이 야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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