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은 70년대 이야기'라고 믿는 그대들에게 (1)

울산 INP 중공업 - 100% 비정규직, 0% 근로기준법

검토 완료

이선이(freedawn)등록 2001.02.06 12:35
무서운 영화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수많은 386들을 술집으로 이끌었고, 서른을 훌쩍 넘긴 어른의 눈에서 눈물을 쏙 뽑아냈던 그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너무 무섭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이제 저런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믿을까봐 너무 무서워.'

그래, 나도 무섭다. 지켜지지도 않는 근로기준법과 함께 스스로를 불태운 전태일이 민주화 공로자로 선정되고, 청계천 그 자리에 전태일 거리가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지금이 70년대가 아니라 2000년대라는 사실에 감사할까봐 무섭다.

'근로기준법은 70년대 이야기'라고 믿는 그대들에게 여기, 울산에 있는 한 조선소를 소개한다.

100%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진 회사, INP 중공업

울산 아무데서나 방어진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종점에 내리면 시큼한 바닷내와 함께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먼저 달려든다.

INP 중공업은 2000년 2월 공장 가동을 시작한 중소 조선소이다. '현대 왕국'이라는 울산에서 현대 계열사가 아니라는 것 외에 INP 중공업을 독보적으로 만들어주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모든 노동자가 비정규직이라는 것. 200∼250 여명에 달하는 현장 노동자 모두 사내 하청, 일당직 노동자이며, 100여명의 사무관리직 역시 전원 계약직이다.

한국와 중국, 일본을 제외하고는 전세계적으로 사양화의 길에 접어들었을 만큼 대표적인 3D 업종인 조선소 막노동,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 여기에 근로기준법 위반, 4대 보험 미가입, 상습적인 임금 체불 등 최악의 노동조건까지 겹쳐 INP 중공업은 '노동자의 고려장'으로 통한다. 노동자들은 INP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해방의 바람>에서 식당 기습 시위까지

2000년 8월 18일 금요일. '해방의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INP의 실상을 폭로하는 유인물 200여 장이 배포되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유인물에 노동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10월 6일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매주 발간된 '해방의 바람'은 회사의 배포 방해와 폭력 행사에도 불구하고 '무풍지대' INP에 최초의 바람을 일으켰다.

9월 29일 12시 5분, 바람을 일으킨 '배후 세력'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내 하청업체인 신원 건설 소속으로 도장부에 근무하는 서른 둘의 노동자 김형기 씨.

다른 두 명과 함께 비밀리에 'INP 하청 노동자 모임'을 꾸리고 노조 결성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점심 시간을 틈타 식당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총무부 직원들이 들이닥쳤고, 노동자들의 항의를 뒤로 한 채 몰매를 맞으며 본관으로 끌려갔다.

오후 3시까지 폭행과 협박, 소속 업체 사장과의 면담이 있고 나서야 작업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업체 위장 폐업, 긴 싸움의 시작

'못된 송아지'가 누군지 알긴 했지만 회사는 즉시 김씨를 해고하지는 않았다. '부당 해고'를 했다가 외려 혹을 하나 더 붙일까봐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대신 회사가 택한 방법은 그가 속한 업체(신원 건설)의 위장 폐업.

10월 6일 오후 신원건설 사장이 업체 직원 전체를 불러모으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대신 임금을 깎자. 아니면 회사 문을 닫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10월 7일 업체폐업 신고를 냈다. 하지만 이것은 서류상의 폐업이었을 뿐이다. 업체와 명의인 이름을 살짝 바꾼 '태선 건설'이라는 업체가 새로 생겨났고, 신원건설이 하던 도장 작업을 넘겨받았다. 신원건설 노동자들도 모두 태선건설 소속으로 옮겨졌지만, 당연히 '불순세력' 3인은 제외되었다.

업체 폐업이 본격화된 10월 6일,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고 있던 이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언제 업체가 폐업될 지 모르니 신속히 노조를 설립할 것"을 결정했다. 10월 8일 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 선출(위원장-김형기, 사무장-김형철, 회계감사-권택준)과 규약제정을 마쳤다. 마침내 10월 9일 점심시간, 식당에서 노조 창립 보고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회사는 조합 간부 3인에 대해 '업체 폐업으로 인한 자동 퇴사'라며 강제로 회사 밖으로 끌어냈다.

길고 긴 정문 앞 투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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