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의 노인(1)

노인과 소설 읽기

검토 완료

유경(treeappl)등록 2001.02.13 23:16
지난 99년 여름, 당시 근무하던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문화체험 교실의 하나로 '소설 읽기반'을 진행한 적이 있다.

순전히 노인대학 담당자인 본인의 소설읽기 취미를 노인대상 시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본 것인데, 소설 읽기가 노인분들의 인지력과 표현력의 향상은 물론 정서적으로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시작되었다.

소설 한 편씩을 정해서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한 자리에 모여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제일 먼저 선정한 소설이 "늙은이들 얘기가 대부분"이라고 저자도 서문에서 밝힌 박완서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첫 번째로 나오는 단편 '마른 꽃'이었다.

… 삼남매를 잘 키워내고 혼자 살고 있는 우아한 60세 할머니인 나는, 친정 조카 결혼식에 다녀오던 버스에서 청남색 아콰마린 반지를 낀 조박사와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다. 카키색 트렌치코트에 배도 안 나오고 다리도 길고 걸음걸이도 여유있고 늠름한 신사를 향한 호기심으로 시작돼, 결국 조박사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가슴이 소녀처럼 발랑발랑 뛰는 경험도 하게 된다. 나와 조박사의 이런 만남 한편에서는 연줄을 통해 아는 사이인 것으로 밝혀진 조박사의 며느리와 나의 딸이 두 사람의 재혼을 거론하는 것을 알게 되고, 홀시아버지의 재혼을 서두르는 조박사의 며느리를 통해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조박사와의 사이의 연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빠안히 모든 것이 보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에게 한 번 과부 된 것도 억울한데 두 번씩 과부 될지도 모르는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

'소설 읽기반'은 60세가 넘으신 할머니 열 두 분이 참여하셨는데, 소설책의 글자 크기가 너무 작아 확대 복사한 자료로 읽다보니 책을 읽는다는 감흥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참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읽어 나가는 가운데 여자 주인공이 조박사에 대해서 느끼는 가슴 떨림과 강아지를 핑계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만큼 간사스러워진 감정을 솔직히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웃음과 환호가 터져 나왔고, 소설을 다 읽고 전체적으로 소감을 나누고 토론하는 순서에서는 단연코 주인공과 조박사의 연애 감정과 재혼이 주제였다.

노년기의 연애와 재혼에 대한 찬반 의견이 중요한 시간은 아니었다.
소설 한 편을 같이 읽고 그 소설에 대한 느낌을 서로 나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하고 드문 경험이었다.

'소설 읽기반'을 만들며 목표로 했던, ① 글 읽기를 통한 인지력 향상 ②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표현력과 발음이 좋아짐 ③ 책 읽는 일과 멀어지는 노인들에게 단체 독서의 기회 제공 ④ 책 읽은 후의 토론을 통해 발표력·논리적인 능력 향상 기대 ⑤ 읽은 내용을 다시 기억해 보는 과정을 통해 기억력 증진 ⑥ 정서적으로 안정되며 상상력을 키운다는, 형식적인 결과 이상의 것을 얻고 체험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노인분들이 읽기에 좋은 소설들을 골라 큰 글자로 인쇄·편집한 소설 모음집이 나왔으면 하는 점이다.

노인분들이 책 - 특히 바로 자신의 이야기인 노인 관련 주제나 소재를 다룬 책을 많이 읽고, 그것으로 책읽어 주기 봉사 활동도 하신다면 …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돋보기를 쓰고 열심히 책을 읽으시는 어르신들의 모습, 그것만으로도 아름답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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