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왜곡의 이유

검토 완료

최항기(flyturtle)등록 2001.02.22 15:18
일본의 과거사 왜곡 역사교과서가 연일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왜곡 교과서는 현재로선 검정을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주변국에서는 일본이 자국의 역사기술을 왜곡한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제재할 방도는 없다. 단, '국가간의 감정악화'라는 점에서 일본에게는 마이너스 요인이 적용될 뿐이다.

대체 거듭되는 일본의 역사왜곡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점을 알아보려면 역시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본은 2차대전중 침략자로써 우리나라와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태평양, 심지어는 호주북부지역까지도 진군했다. 그 와중에 전투를 벌인 상대는 중국 본토에서의 중국군 외에는 미국과 영국연방군이었다. 동남아시아 침공 와중에서 실질적인 아시아에서의 영국군 주력을 괴멸시킨 일본은 주로 미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퇴각을 거듭하는 일본군은 태평양의 섬들을 기점으로 미국에게 끈질긴 저항을 해온다. 마침내 일본본토로의 진군을 눈앞에 둔 미국은 작은 섬 하나를 공격하는데도 상당한 희생자가 나왔던 점을 감안, 본토 공격에 상당한 희생자가 나올 것을 우려하고 신무기인 핵탄두를 사용할 것을 결정한다. 이후 일본은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한다.

패전국 일본에 도착한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전후처리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면을 보여준다. 몇몇 전쟁범죄자에 대한 처벌과 천황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는 것을 끝으로 진정한 전쟁범죄자인 히로히토 천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압력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후 일본에 대한 적대심을 줄이기 위해 취한 조치였지만 이로써 소련과의 완충지대가 우리나라로 설정되어 분단의 비극이 생기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중국은 곧바로 국공내전이 시작되며 더 이상 일본과의 전후처리에 대해 왈가불가할 입장이 못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타의에 의한 역사적인 심판을 받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후 우리나라의 6.25를 기회로 미군의 군수창고 역할을 담당한 일본은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은 당시 대다수의 일본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반사회적인 단체를 조직할 정도로 심했다. 즉, 전후 사회적 상황들은 침략자적 태도에 대한 반성보다는 자본과 그에 대항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사상적 행보로써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후 일본에 대한 과거사 사죄와 보상비 등의 문제가 거론되었지만 그때마다 일본측은 단순대응으로써 사건을 무마해 나갔다. 더군다나 이러한 일들은 당시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들이 진정한 사죄를 받기보다는 일본의 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경제적 열망으로 비롯되었다.

경제적으로 부를 이룩한 일본은 이후에도 망언을 일삼아 아시아 각국의 반발을 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발언들이 과거세대의 영광된 해외진출 행위의 발로라고 여길 뿐이었고 다른 나라들의 반발은 귀로 흘릴 뿐이었다.

이런 배후를 등에 엎고 일본은 교과서 왜곡을 당연한 듯이 자행하고 있다. 그들은 침략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느끼지 못했고, 침략당사국에게 항복한 게 아닌 미국에게 항복을 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을 이용한 일본 기성세대로 인해 일본의 젊은이들은 2차대전중 자국의 군대가 침략전쟁에 참가했다는 사실도 모르거나 기껏해야 미국과 전쟁을 벌인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는 2차전쟁중 일본의 침략을 미화한 만화가 크게 인기를 끌 정도다.(일본에서 만화의 위상은 높다.)

따라서 이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길은 양심에 호소하거나 한번의 항의로만 그쳐 될 것이 아니다. 우선 외교적인 힘을 키워야 되며 우리나라의 역사인식 또한 과거사를 잊지 않도록 견고히 다져야 한다. 교과서만 왜곡시키지 않는다고 이들의 의식이 금세 달라지진 않는다.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