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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남자애들이 꽤 많이 쓰는 말 중에 작업이라는 말이 있지. 그렇지만 난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섬찟섬찟 놀라게 된다. 마치 내가 벌겨벗기운 채 시장에라도 내놓인 듯한 느낌. 비단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거야.
내가 알기로는 그 단어, 모 프로그램에서 어떤 주인공이 극중에서 즐겨 쓰는 것에서 시작된 걸로 아는데. 예전에 공일오비가 "신인류의 사랑"이라는 노래를 들고 나오면서 한때 신세대라는 다소 식상한 말 대신 신인류라는 약간은 생소한 단어(하지만 결국 그 단어도 전혀 새로울 건 없었다. 일본에서 신세대를 부르는 말이 신인류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잖아)가 유행을 했던 것처럼, 확실히 작업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낯설기도 하면서 그 낯설음에서 오는 신선함은 꽤나 흥미를 가져다 준다.
하지만. 그 단어를 남발(..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지?)하기에 앞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닌 건지 진지하게 생각했을까.
작업이라는 말은 엄연한 의미에서 타자를 대상화시키는 것이다. 작업대상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부정할 수는 없을 테지. 대상화. 그게 얼마나 엄청난 건지 알고 있을까? 얼마나 비참하고 잔인한 건지? 존중받아야 할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이 단지 어떤 대상으로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자유를 가진 주체가 생명 없는 물건으로 하등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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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으로 써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가 지금 악으로 규정하는 노예(우리 나라에선 노비)제도나 인신매매, 심지어 매춘 행위까지 모두 그런 대상화 과정에서 나온 거라는 걸 알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르트르는 그의 실존철학에서 타인의 시선을 상대방을 꿰뚫어 마침내 그를 굴복시키고야 마는 무서운 비수로 간주한다. 그래서 어쩜 인간은 벽이라는 수단을 만들어 그 지긋지긋한 남의 시선이라는 지옥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대상>이 되어 남의 시선에 노출된 사람의 수치심이 강박관념처럼 그 사람을 죄어 온다는 생각은 안드는 것일까.
언젠가 썰렁하다는 말이 꽤나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가 그냥 해본 말에도 "썰렁해~"라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에게 일련의 수치심을 안겨주는 게 일상시되었던 시기였다. 마치 온 국민이 코미디언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듯.
맹목적인 게 가끔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맹목에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건 냉철한 분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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