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칠한 늑대의 손, 조선일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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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yjryu)등록 2001.07.07 10:05
나는 가끔씩 “왜 몸서리 치도록 조선일보가 싫은가?”라는 자문을 해보곤 한다.
따져보면 집안 대대로 한 40여년 구독해왔던 신문이 조선일보고 게다가 나와 조선은 생일마저도 3월5일로 똑같을 뿐더러 지난 83년 어느날엔가는 우리 가족전체가 "명사의 휴일”이라는 코너에 실리기도 했으니 어찌 보면 가장 친근할 수 있는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는 신문이 조선일보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토록 조선일보를 좃선이라 호칭하며 미워하다 못해 경멸하고 있는 것인가?

설혹 무슨 이념의 차이 내지는 관점의 상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경멸의 상대라기 보다는 거북함의 대상으로 삼고 마는 것이 내 건강에도 유익할 것이며 또 조선이 함량 미달 내지는 오보나 거짓말을 일삼는 기사를 양산하기 때문이라면 그저 구독을 끊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으면 그 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도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하기에 <안타조선의 전사>라도 된 양 간혹 조선일보의 사설이나 김대중주필의 칼럼 등을 접할 때마다 주체 못할 증오와 모멸감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말이다.

<조선일보>가 일관되게 비판하는 DJ와 지역적 동질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조선일보가 일관되게 뒤를 밀어주는 제1야당당수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차피 "정치판은 개판 5분전”이라는 것이 내 개인적 소신일 뿐더러 정치권에 대하여는 "초록은 동색”이라는 냉소주의적 영역에 머물러 온지 어언 10여년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오늘은 한번 나 스스로도 한번 되짚고 넘어가 볼일이다.

과거 독재정권시절 "언론자유 곧 민주주의의 담보”라는 말이 이순간 떠오른다. 이는 독재정권이 가장 두려워하기에 억압하고 왜곡하고 있는 민의를 수렴하여 여론이라는 이름의 옷을 입혀 주는 작업이 바로 언론의 고유 권리이자 또한 사명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할 말을 하며 주어진 소명감에 충일했던 "언론가”들 에게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일컬으며 한없는 존경과 갈채를 보냈던 반면 생존과 사세확장이라는 상업주의에 경도되어 군부정권의 나팔수이기를 자임하였던 "언론꾼”들에게는 손가락질과 한없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언론꾼의 한가운데에 조선일보가 있었다. 그들은 박정희의 군화밑에 있었고, 전두환,노태우의 창검 밑에서는 몸을 파는 창녀와 유사한 생존본능으로 붓과 펜을 매매하며 일로 전진 오늘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알고 보니 조선일보는 교활하리만치 상황논리에 민첩한 기회주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80년 군부정권을 찬양하며 보다 먼저 민중의 심장에 예리한 펜촉을 찔러댔던 그들은 이미 언론가 이기를 거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와서는 언론자유 운운하며 30여년동안 회피 내지 방기 해왔던 의무 불이행부분에 대하여는 일언반구 반성의 기미도 없이 그 척박했던 질곡의 시절 한으로 점철된 민초들의 외마디 비명조차 외면했던 터에 이제 와서는 언론탄압의 희생양인양 때로는 신파조로 때로는 조폭적 방식으로 으름장과 비명을 질러대고 있으니 참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또한 조선일보는 그들과 다른 자들을 끊임없이 마녀사냥하고 있다. 색깔론이라는 덫을 씌워 사회적 매장을 자행하고 있다. 그들이 주창하는 바 극우.보수.친미.반공적 이념에 대항하는 자들은 이미 그들의 먹이감이 되고 만다. 생각해 보라. 연일 지면을 장식하며 시리즈로 떠들어 대는 폭력적 여론몰이에 누군들 당해 낼 재간이 있겠는가 말이다. 하여간 그들은 자신들의 페이스와 입맛대로 이 나라가 돌아가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집단이다.

북한의 김정일이 죽도록 밉다 해서 언제까지 승공적 파시즘의 망령에 미쳐 있을 것인가? 수많은 동포와 애국 지사들을 학살했던 원흉 일본과 화해한지는 어언 35년 여가 지났고, 파상적 인해전술로 우리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았던 중국과도 교류한지 한참이며, KAL기 격추로 수많은 인명을 앗아 갔던 소련과도 울분과 구원을 뒤로 한 채 관계정상화를 이루고 있는 판에 언제까지 "때려잡자 김정일”식의 시대착오적 도그마에 매몰되어 있을 것인가 말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그런데 조선일보야 말로 최대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느냐고.

나는 그들에게 다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반조선일보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애당초 조선일보가 마이너신문 이라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신문은 불행하게도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이다. 아침마다 상당수의 국민들이 이 신문을 통해 세상을 접하고 정보를 얻으며 부지불식간 사회화.정치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대중적인 것이 곧 선한 것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선거, 즉 가장 대중적인 투표를 바탕으로 생성되는 정치권력이 결코 선하지도 옳지도 않다는 점에서 입증되고도 남는 것이다.
또한 몰인간화되는 현대사회에서 대중화에의 성공이란 "선정성과 폭력성” 그리고 "자극성과 편의성”으로의 하향화와 다름 아니기에 조선일보는 이러한 대중성의 본질을 파악하고 적절히 그 필요와 욕구를 상품화하는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기업이라면 모를까 언론 그것도 대표적 신문사에 한해서는 상업주의의 본능적 속성인 대중성으로의 하향화를 견제함은 물론이고 누군가는 그 휘장 뒤에 숨어 있는 독소와 폐해를 지적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계도해야 할 일이다. 깨어 있는 자들은 모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정치는 그들의 자정능력의 원천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거라는 형태의 외부적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언론은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과 다름 아니다. 그들은 임기도 없으며 또한 그 어떠한 외부적 견제나 비판도 그들에게 스며들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오고 만다. 그들에 대한 비판도 그들 자신에게 위임되어 있을 뿐이다. 이 어찌 절대왕조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시대적 소명과 부끄럼 없는 양심으로 정론을 펼치는 언론가 들에게는 한없는 자유와 갈채를 보내 마땅하다. 그러나 흠 없는 순결함을 무기로 어지러운 세태 썩어가는 정치를 날카롭게 견제하라고 했건만 똑같이 보고 배워, 못지않게 부패한 언론권력에 대하여는 역시 준엄한 심판의 장치가 필요하다. 더 이상 언론이 세습 유지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언론권력에게도 임기는 주어져야 한다. 이미 자정의 기능을 상실한 사이비 언론 꾼들에게는 他淨의 장을 통한 상시 퇴출의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금 문밖에 서서 엄마양을 가장하여 회 칠한 손을 내밀고 “아가야 엄마다 문 열어라”라고 현혹하는 늑대에게 무대책으로 유린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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