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김준배 씨 '프락치 공작' 후배 양심선언

경찰 협조하면 3500만원 제의, 죽을 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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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youngtjs)등록 2001.09.10 09:45
의문사 김준배 씨 `프락치 공작' 후배 양심선언

“경찰 협조하면 3500만원 제의 … 죽을 죄 졌다.”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은 악몽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프락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지난 97년 의문사한 김준배(당시 한총련 투쟁국장) 씨의 후배 B모(29) 씨가 지난 6일 학원 프락치 공작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

 양심선언을 하기로 한 이날 오후 8시 15분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는 긴장감마저 돌았다. 김 씨의 아버지 김현국(66) 씨는 연신 담배를 피우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4년전 세상을 떠난 아들의 사인을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당시 프락치 공작에 가담했던 후배 전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떨구고 민변 사무실에 들어선 B씨는 8시30분께 `준배형 그리고 아버님, 무릎 꿇고 사죄드립니다'라는 제목의 편지를 담담히 읽어갔다.

 “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지난 과오를 잊어버릴려고 매일 술도 마셔봤고, 극한 생각도 했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군 B씨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김 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프락치 활동의 동기를 설명했다.

 지난 97년 7~8월께 대학 선배 C씨에게 백화점 직원이라고 A씨를 소개 받은 B씨. 나중에 A씨가 경찰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별다른 거부감없이 만남을 계속하다 C씨를 통해 프락치 제의를 받았다.

 “준배 형이 수배생활을 청산, 새 생활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협조하면 경찰이 3500만원의 돈을 줄 것이라는 C선배의 얘기도 있어서…”  
아버지 김 씨는 “준배가 3000만원짜리 밖에 안되냐고 누군가가 장례식장에서 울부짖을 때는 의미를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B씨는 “두 차례 정도 단란주점에서 접대를 받았고 여러 차례 술접대를 받았지만 돈을 받은 일은 없다”며 “구치소에서 1개월을 지내고 출소한 뒤 A씨가 20만~30만원을 건넨 적은 있다”고 했다.

 B씨의 수사를 책임졌던 정윤기(현 영월지청장) 검사가 프락치 사실을 알았냐는 김 씨의 질문이 있었지만 B씨는 말끝을 흐렸다. B씨의 양심선언은 정검사의 프락치 사전 인지 여부, 3500만원이라는 거액의 행방 등 핵심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채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를 함께 했던 `김준배 열사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민변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겠군요”라는 자조섞인 한마디를 던지며 하나, 둘 자리를 떴다.

/류정민 기자 dongack@laborw.com (노동일보 9월 8일자13면 기사입니다)



김준배 후배 B씨 양심선언문 전문

준배형 그리고 아버님, 무릎끓고 사죄드립니다.
준배형을 좋아했던 선후배들에게도 사죄드립니다.

지금에 와서 제가 무슨 말을 한들 형과 아버님에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형이 그토록 바라던 통일된 세상은 아직도 멀었는데, 형은 주검이 되어 망월묘역에 누워있다는걸 생각해보면 죄책감으로 눈을 뜬채로 밤을 센 날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날밤 저는 형이 그처럼 허망하게 경찰의 구타로 그렇게 떠날줄은 몰랐습니다. 6년여에 걸친 오랜 수배생활을 하는 형을 생각할때면 안쓰러웠고, 정리할 계기를 나름대로 찾길 바랬습니다. 수배생활을 정리하고 좀더 자유럽게 넓은 세상에서 새롭게 출발하기만 바랬던 순진했던 제 생각이 오히려 형의 꽃다운 청춘을 앗아갈줄은 꿈에도 물랐습니다.

그날 이후 저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은 악몽의 연속이었습니다. 저의 행동을 모르는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볼때마다, 형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 심장이 떨려왔었습니다. 지난 과오를 잊어버릴려고 매일 술도 마셔봤고, 극한 생각도 했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봤습니다. 형이 죽음에 이르게 된데는 구타와 함께 프락치 공작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제가 바로 그 프락치였다는 사실이 스스로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그제서야, 제가 뭔가에 홀리지 않았나 아차 싶기도 했습니다. 순간이나마 형이 성공적으로 도망치길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구속이 되었고, 보석으로 석방된 후로도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활동 80시간 보호관찰이 3년간 지속해 왔었습니다.

올해 초 의문사 진상규명위원의 소환에 따라 몇차례 조사에 응했습니다.
처음에는 두렵고 어떻게 될지 몰라 주저했지만, 책임소재에 있어 무책임했던 진술은 그냥 넘기기엔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또한 모든걸 사실데로 밝혀야만 조금이라도 떳떳해 질수 있고, 용서를 빌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조사에서는 모든 것을 밝혔고 그후 아버님을 찾아가 사죄하고, 이렇게 글로나마 준배형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에게 사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선 저와 그 형사와의 관계를 말한다면 저에게 그 형사를 소개해준 학교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처음부터 그 형사를 백화점 직원이라고만 말해 그냥 선배의 동료인지 알았고 술자리를 통해 스스럼 없이 친해졌습니다. 나중에야 그사람이 형사인지 알았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친절하게 잘 대해줬고, 학교 담당 정보과 형사가 아니기에 거부감없이 만날수 있었습니다. 또한 소개해준 선배와도 가깝게 지내기에 죄의식 없었고, 뭔가 바라는게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해봤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때여서 별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사건당시 형사는 준배형이 케이블을 타고 내려온 시간을 짧게해 추락사로 만들기 위해서 였는지, 아파트 출입구에서 몇분간 강하게 저항했다라는 거짓 증언을 시켰지만 그럴수 없어 사실대로 얘기했었습니다. 그후 저는 범인은닉으로 구속 되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형이 그렇게 죽게된 것이 제 책임도 있다는 생각에 아무말도 할수 없었습니다.

형은 그렇게 떠나고 말았습니다.
형은 언제나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는 건강하고 존경스런 선배였습니다. 한순간의 제 실수로 형을 경찰에게 알려줬지만 형은 그누구보다 조국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투사였고, 전사였습니다. 형이 죄가 있다면 단지 조국을 너무나 사랑하고 정의로웠다는 것 뿐입니다. 그런 형을 잡기위해 경찰은 저를 의도적으로 접근해 이용했고, 그것만이 아니라 형을 구타해 죽게 했습니다. 지은 죄가 너무 커 저는 침묵하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다 밝히고 나니 오히려 가슴이 후련합니다.

뒤늦게나마 형에게 그리고 아버님께 무릎끓고 사죄드리며, 형을 기억하는 모든분들과 국민들에게도 사죄드립니다. 저에게 기회가 준어진다면 형이 못다한 일을 해내며 최선을 다해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분께 사죄드립니다.

2001. 9. 6
준배형을 좋아했던 못난 후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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