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무지, 집단폭력, 그들이 과연 경찰인가?

오이도참사 1주년 장애인이동권집회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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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leviolette)등록 2002.01.23 20:04
2001년 1월 22일, 서울 4호선 종착역인 오이도 역에서 수직형 리프트가 추락하여 장애인 노부부 중 한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단순한 안전사고가 아니라 장애인의 이동권 현실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건이었고, 이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쟁취를 위한 힘찬 투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인 어제, 그러한 힘찬 투쟁에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 현실에 장애인들은 또 한번 분노했고, 영하권의 추운 날씨에도 그들은 다시 거리로 몰려나왔다.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대표 박경석 이하 이동권연대)는 이날 오전 장애인의 이동에 있어서의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헌법재판소와 국가인권위원회에 헌법소원과 진정서를 각각 제출하고 11시 혜화로터리에서 오이도역수직리프트추락참사 1주년 기자회견을 가진후, 오후 1시부터는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결의대회'와 '제10차 장애인도버스를탑시다' 행사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노들장애인야간학교,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민중복지연대,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등 이동권연대 소속단체들과 민주노동당, 사회당,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 진보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노빈학연대회의, 민중연대투쟁단 등의 학생단위 등 많은 단체들에서 휠체어장애인 50여 명을 비롯한 200여 명의 대오가 모였다.

이 자리에는 '근조 버스'라고 쓰인 각 소속단체의 조화가 있었고, 휠체어장애인들은 검은 종이로 만든 칼을 쓰고 집회에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결의대회에서는 종이로 만든 일반버스 모형에 대한 화형식을 진행해 사회적인 감옥에 갇혀있는 장애인들의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표현하였다.

결의대회가 끝나고 장애, 비장애 시민들은 버스타기 행사를 시작하려 하였다. 원래 계획은 혜화로터리에서 8번과 20번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정리집회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헬멧과 방패(어제 방패는 명백한 무기로 사용되었다.)로 무장한 전투경찰을 동원, 버스를 타려 하는 장애인들의 앞을 막아섰다. 이유는 집회에 사용하고 있던 조화가 폭력을 유발하는 불법집회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해도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이유인 것이다. '조화가 폭력을 유발한다'면, 대부분의 장례식장에서 폭력사태가 예상될 것이고, 이의 저지를 위해서만도 경찰병력이 부족할 것인데 말이다.

장애인들은 이곳 저곳으로 경찰의 저지선을 우회하여 도로로 진입하여 버스를 타려 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경찰은 대여섯명씩 달려들어 장애인들을 인도로 끌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집회참여자들을 주동자라 하여 연행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한동안 버스를 타려는 장애인들과 경찰간의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고, 더 이상의 대치가 의미가 없음을 판단한 이동권연대는 일단 집회대오를 해산하고 각자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세종문화회관으로 집결하였다.

지하철 환승역인 동대문운동장역에 설치된 경사형리프트의 고장으로 많은 시간을 지체하여 집결시간보다 30분이나 늦은 5시경에야 세종문화회관 앞에 도착하였다.

이동권연대 소속 대학생 2명이 이순신장군 동상에 올라가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싶다'는 현수막을 내리고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고, 집회대오는 세종문화회관 옆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었다. 대오는 광화문 사거리 쪽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저지에 막혀 뒷길로 우회하여 이동하였다.

곧이어 휠체어 장애인 20여 명을 비롯한 50여 명의 대오가 광화문 사거리를 막아섰고, 쇠사슬로 휠체어 사이를 연결하려 하였다. 그때 경찰이 절단기로 연결중인 쇠사슬을 무리하게 끊으려 하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기자가 막아서자 경찰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기자를 끌어내라고 하였고, 완강히 저항하다가 바닥에 넘어진 기자의 주위로 전투경찰들이 몰려들어 군홧발로 허리와 등을 차는 등 집단 구타를 자행하였다. 경찰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상태였고, 그 무지와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국 사지를 들려 교보생명 빌딩 앞으로 끌려나왔고, 연행지시도 없었는데다가 기대마(전경버스)도 대기하고 있지 않자 기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기자가 구타에 의한 통증으로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자 지나가던 시민들이 전경들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왔고, 전경들은 기자를 술취한 사람 취급하였다.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정신이 없었고, 마침 집회에 참석했던 전국노점상연합회 회원분이 오셔서 기자를 데리고 봉고차에 가서 잠시 숨을 돌리게 해 주셨다.

정신을 수습하고 대오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파악한 후 다시 광화문사거리 편의점 앞으로 갔다. 사거리를 점거했던 장애인들이 하나 둘 기자가 있는 곳으로 들려나왔고, 일부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휠체어 장애인 몇 명은 방패에 이마가 찢겨 피를 흘려 병원에 실려가는 등 경찰의 폭력은 이미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들려나온 장애인들은 어디로도 '이동'할 수 없었다. 아마도 경찰서로 항의방문 갈 것이라 판단하고 원천봉쇄를 하는 듯했다. 휠체어 장애인 20여 명을 비롯한 30여 명의 사람들이 인도에 억류된 채 1시간이 넘도록 추위에 떨어야 했다. 결국 7시 30분이 넘어서야 억류를 풀었고, 대오는 경찰들의 호위(?) 아래 해산한뒤 일부는 종로경찰서로 항의방문을 진행하였다.

이순신장군 동상을 점거했던 두 명의 대학생을 비롯하여 38명의 연행자들은 일단 종로경찰서에 18명이 남고 나머지는 남대문과 중부경찰서로 분산 송치되었다. 기자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고 이후 행동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기자가 속한 단체 동료와 함께 사무실에 들렀다가 10시경 다시 종로경찰서로 향했다. 종로경찰서에서는 12시가 넘어서야 석방이 될 것이라 하고, 상황이 종료되어 남대문 경찰서로 연행자 면회를 가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런데 남대문경찰서에서는 면회를 하러 온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추위에 약한 장애인들이 떨고 있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이야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단순히 불법행위가 예상된다며 있지도 않은 전례 운운하며 '공공서를 보호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공공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공공서의 주인인 시민이 동상에 걸려 죽어도 된다는 논리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장애인은 이미 시민이 아니라 자신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들어가려는 장애인들과 경찰들 사이의 몇 차례의 충돌이 진행되면서 면회가 계속 이루어졌고, 면회가 끝난 후 다시 해산하여 기자를 포함한 일부는 귀가하고 나머지는 중부경찰서로 이동하였다.

이날 연행된 사람들은 당일 풀려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음날인 오늘 오후 4시경에야 모두 풀려났다. 이들 중 이순신장군 동상 점거자를 비롯한 6명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나머지는 즉결심판 처리되었다. 연행자중에 집회에 처음 참가한 대학 1학년생도 있음에도 훈방없이 전원 즉결심판 처리는 장애인 집회사상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하루 장애인 이동권 집회를 취재하면서 다시 한번 경찰의 무지와 폭력성, 불법성 등을 확인하게 되었다. 결국 오늘의 불법시위(누구를 위한 법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를 유발한 것은 조화가 아니라 경찰 스스로의 불법, 폭력성과 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대로 된 법이 제정되고 그에 따라 제대로 집행될 때만이 공권력이라는 것이 효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단순히 무자비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루 빨리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공권력다운 면모를 지니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더 이상 장애인들의 정당한 요구에 무지한 폭력으로 일관하지 않기를 바란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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