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과 함께 산을 내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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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rady)등록 2002.04.19 20:42
오늘은 어떤 길로 해서 집으로 가나. 아홉 시가 넘어도 붐비기만 하는 도로는 나로 하여금 산길을 타게 한다. 북악산 스카이웨이로 팔각정을 스쳐 지나 사직터널 앞으로 내려가는 길은 한적한 데다 신호등도 없다.

차는 능선을 타고 달린다. 산벚꽃 벌써 지워지는 듯 밤에도 하얗던 길이 어느새 캄캄하다. 개나리꽃 지고 진달래꽃 어둠에 묻혀 잠들어 있다. 정적 사이로 1993년산 50만 원짜리 엘란트라 엔진소리만 갸릉갸릉 들린다.

팔각정 전망대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서니 자동차도 소리를 죽이고 앞뒤에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먼 아래로 점점이 흩뿌린 도시의 불빛이 꽃답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노란 꽃. 나는 그 꽃송이들을 하나하나 다 감상하겠다는 듯 가능한 한 천천히 낙하해 간다.

모르는 사이에 나는 누군가와 함께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이 길의 존재를 가르쳐준 이였으니 저 아래 어둠과 빛의 풍경화 속에는 그의 모습이 드리워져 있었다.

정릉에 있는 학교에 왔더니 시를 쓰는 그가 있었다. 시집 한 권 내고 20년 동안 숨어산 사람, 오랫동안 이 고적한 밤길을 혼자서 오르내린 사람, 초원과 사막과 툰드라와 빙설의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흘째 병원에 누워 있었다. 과로의 나날 끝에 그는 환자실로 들어갔다. 며칠 전 월요일 그는 식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점심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식사를 마저 끝내고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나는 무심했는데, 그가 병실에 누워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가 나와 함께 저 하늘 저 산 저 도시의 불빛꽃을 바라보며 낙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심할 것이 없다. 붉은 피가 잠시 그의 입술을 물들였다 해도 그의 시가 그것을 씻어내 줄테니. 이제 낙하운동에 길들여져야 할 때. 나보다 20년 먼저 이곳을 찾아온 그와 그만큼 늦게 이곳에 온 내가 함께 하강의 실감을 맛보고 있을 뿐이다.'

밤의 산은 말이 없다. 산 아래 꽃들도 말이 없다. 행글라이더에 몸을 맡긴 사람처럼 느릿느릿 바람을 타면서, 나는 바닥이 없을 것 같은 지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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