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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에 대해 난 잘 모른다. <씨네21> 맨 뒷 표지에 가끔씩 실리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칼럼을 그것도 가끔씩 봐왔을 뿐이다. 논제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전적인 공감을 표한 글도 가끔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 어디서 뭐하던 사람인지는 몰라도 괜찮은 사람 하나 나왔구나. 내 심중에 눌려있던 얘기들을 거침없이 뽑아내는 그의 글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나와 비슷했던 것같다. 그 인기의 여세를 몰아그는 여기저기서 써놓은 글을 모아놓은 칼럼집도 두어 권 냈고 대학생 애들은 꽤나 심각한 포즈를 취하며 그의 글을 읽어내려갔을 테다.
그렇지만 김규항, 진중권, 강준만 같은 이들이 언제부턴가 스타 칼럼니스트가 되어 대학생의 정신적 리더처럼 돼버린 건 인문주의적, 사회과학적 교양 수준이 천박한 21세기의 우스꽝스런 현실이다. 그들에겐 보수를 깨뜨리려는 열정이 있지만 그들에겐 그 열정의 이면마저 흔쾌히 받아들이기에는 껄끄러운 무엇이 있다. 끈덕진 보수에 정말 그 정도의 흡착력으로 끈덕지게 달라붙어 조롱하고 타매하는 그들에게서 또다른 보수의 완고함을 본다, 방향성 없는 열기를 느낀다는 애매한 감상을 늘어놓으면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우연히 텍스트파일로 된 김규항의 책을 구하게 돼서 읽어보려다가 썩 내키지 않아 읽기를 관두고 말았다. 칼럼이란 게 다 그렇지만 지식과 교양, 비판이 적당히 뒤섞인 패스트푸드 같아서 따끈할 때 맛있지 조금만 지나면 쳐다보기도 싫어지게 마련이다.
그게 내가 가진 김규항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 지금까지 무얼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에 <씨네21>에 쓴 그의 칼럼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내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화해할 수 없는 80년대적 인식을...
그가 칼럼에서 토해내고 있는 논리는 맑스-엥겔스 문학예술 개론에 깊게 침윤된 이데올로그가 페미니즘 개론에 등장하는 문제의식으로 논리와 현실(운동)을 비판하는 식의 두루뭉수리함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태도마저 무지한 대중들에게 선도적 문제의식을 설파하는 양이어서 고약하기 짝이 없다.
좌파 칼럼니스트 특유의 삐뚤함 정도는 애교로 봐준다고 치자. 정작 문제는 그의 논리가 진지한 반성과 재확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듯 성마름을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성마름은 쉽사리 계급 모순에 둔감한 듯 보이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도 한때는 김규항 식의 불평이라면 불평 비슷한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페미니스트는 계급적 관점에 대한 고민을 꽝이다!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그 다양한 층위의 사상적 차이를 존중하며 더 큰 목표를 향해 공동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원초적 미분화상태여서 이념적 대립과 논쟁이 들어설 수 없는 건가.
김규항 같은 이는 인간보편의 해방을 희망을 얘기한다. 난 그의 이 말이 그의 진심을 반영한다고 믿고 싶다. 사회주의도 임노동/자본, 계급 대립의 철폐를 통해 자본주의가 부여한 굴레를 자본가도 노동자도 벗어던진, 그런 의미에서 해방된 사회를 만들자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계급 모순에 무심한 듯 보이는 페미니즘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대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실망감만을, 그것도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그의 소아병적 태도이다.
그건 인간보편의 해방을 얘기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믿기에는 실망스럽다. 그의 방식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자신의 섭섭함을 부정적으로 표출하는 방식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만약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만약 그를 존중한다면 한층 심사숙고한 후에 애정어린 방식으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해야 한다. 설령 그 과정에 오류가 개입되더라도 그건 진심과 애정 앞에서 큰 허물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상대방은 그의 진심을 이해하고 더 넓은 마음으로 그 허물을 감싸줄 수 있을 테니까. 김규항의 글은 이런 점에서 봤을 땐 가난한 엄마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철없는 자식의 포즈와 다르지 않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고, 한계도 있는 법이다. 김규항이 생각하듯 페미니스트들이 그 자신의 기본적인 계급론을 경청해야 할 만큼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절실한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자기의 절실함마저 해결하지 못하는 운동이 어떻게 이웃과 세상을 구원하겠는가.
김규항 씨 자신도 운동을 해봤다면 느낄 것이다(운동권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니라면 이하 해당 사항 없음). 운동을 왜 했는가. 자기를 순수히 비운 상태에서 인류의 평화와 고통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서 가슴 졸이며, 졸린 눈 비볐던가.
물론 자기 스스로 그런 모토를 신념화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가장 기본적인 동력은 자기 스스로의 해결되지 못한 부분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지 않았던가. 난 거기서부터 시작했고, 내 주변 친구들도 사정은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깡패처럼 짱돌과 꽃병을 던지다가도 지친 몸을 이끌고 뒷풀이자리에 돌아와 쓴 잔 비우며 울며 궁극적으로 고민한 것은 결국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다.
페미니스트에게서 보수와 화해한 듯, 권력을 얻은 듯한 환상을 보는 건 김규항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트라우마일 것이다. 그런 문제에서라면 나 역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페미니즘이 인기를 얻고 환영받는 듯한 영상은 매스미디어의 조종과 무엇이든 놓칠 수 없는 이 땅 페미니즘의 절박한 고민의 불안한 동거 상태이리라. 그러기에 페미니즘이 무뇌아적으로 시류와 인기에 편승한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거기서 배신감과 열패감을 느끼는 김규항의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트라우마와 적극적으로 싸우기를 거부한 환자의 고집스런 편벽성이다.
실망이라면 그것은 김규항 자신보다 그의 글을 읽은 페미니스트들의 몫일 것이다. 그의 글을 돌려보며 술자리에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는 어떤 이의 글을 읽으며 난 지난 대학시절 폭력 정권의 매도앞에서 힘 없이 비껴서야 했던 아픔을 되씹으며 분노하고 슬퍼했던 밤들을, 그 밤들 내 위장을 타고 내려간 무수한 희석소주의 쓴 맛을 되새겼다. 겉으로 더 환하게 웃는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속에서 역설적인 슬픔을 느끼는 공감의 능력을 김규항은 벌써 잃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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