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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남자 후배가 김규항씨의 '그 페미니즘'을 읽고 내게 말했다.
"누나, 이거 보구 무지 화났어요. 누나는 화 안나요?" 굳이 여성주의자를 자처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이미 강성으로 간주되고 있는 나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김규항씨의 글은 그 공과를 떠나 나에게도 그랬듯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성찰의 기회가 되기 바란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김규항씨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논리를 넘어선 불편함은 언제나 성찰을 요구하는 빨간 신호등인 법이다.
실은 친한 선배와 자주 주고받은 논쟁 중 내가 받는 공격의 대부분도 페미니즘이 노동계급에 관심이 없다는 것 때문이다. 나와 논쟁을 자주 했던 그 선배도 처음에 '주류 페미니즘' 어쩌고 했다가 내가 '한국에 언제 페미니즘이 주류?'했더니 바로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김규항씨의 주장은 내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루한 용어 논쟁을 해야 할 것 같아 유감이다. 필자가 보기에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는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라는 말만큼이나 자기모순적이다. 그 대용으로 부르주아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도 제안되었지만 용어 하나를 만들어내야 할 만큼 소위 지식인층 여성주의자들의 폐해가 강했는지는 모르겠다.
김규항의 글은 아쉽게도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정교하게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정교한 개념 없이 함부로 딱지 붙이는 것은 논쟁에서 삼가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이다.
김규항의 논리대로라면 여성운동을 하는 여자대학생도 '대학생이니까 한국사회에서 주류고, 여성운동을 하니까 페미니즘이네. 그럼 주류 페미니즘 맞네. 그런데 김규항이 쓴 글 보니까 주류페미니즘 나쁜 거래매?' 하는 별 맹구 같은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용어를 합의 없이 대충 쓰는 건 그만큼 위험한 짓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소위 진보진영, 언론개혁과 노무현을 미는 세력 말고, 민노당과 민주노총, 한총련을 중심으로 한 진보진영에서 여성문제를 계급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같이 해결된 문제로 너무 안이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과 자본 간의 전선은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전선이다. 그러나 그 전선이, 남성과 여성 간의 전선에 꼭 겹쳐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차별은 계급에서 기인할 뿐 성적 차이에서 오지 않는다는 인식은 잘못된 점이 있다. 여기엔 분명 두 개의 독립적인 전선이 존재한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대립. 후자의 것은 시덥잖은 성대결이 아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좀 나중에 하겠다.
두 개의 전선은 딱 겹쳐지기도 하고 일부만 겹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따로따로 놀기도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계급과는 아무 상관없이 정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 필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기숙사 내선전화로 음란 전화를 거는 일이 비일비재해, 지금 학생들이 자체모임을 만들어 대책을 세우는 중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계급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학교 학생인데, 무슨 계급 문제가 있겠는가. 막말로 피해자가 남자였다면 당할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폭력 사건에는 계급이 뒤집하는 케이스도 많지는 않지만 좀 있다. 가령 여자 강사나 교수가 남학생에게 피해를 당하는 등. 여성주의자들이 굳이 계급전선과 선을 긋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려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더 예를 들면, 여성비하적인 메세지를 담은 영상매체는 하층 여성들에게만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하니리포터의 김선주 님이 쓰신 글에서처럼 호주제의 폐해는 상류층 부르주아 여성들에게도 분명히 가해진다. 포르노를 보고 강간을 저지른다면 하층 여성이 피해볼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그렇다고 상층 여성들에게 포르노가 심어준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폐해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계급전선과 성차별의 전선은 상호 독립적이다.
그렇다고 두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들끼리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두 개의 전선은 항상 서로를 신경쓰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비근한 예로, '밥.꽃.양'은 보편적인 노동자들과 여성들 양자 모두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보내는 작품이 아닌가.
김규항에게 한마디. 최보은이 도발 전문 페미니스트라면 김규항은 까댐 전문 마초 코뮤니스트인가? 박근혜를 지지하겠다는 말에 많이 실망했던 것 같다. 장정임씨의 입장은 이 글을 쓰는 필자에게도 '절대 불가'이다. 박근혜가 한 게 이제까지 뭐가 있다고?
진보진영에 말씀드리고 싶다. 여성문제는 계급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솔직히 그 문제에 대한 한 여성주의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게 사실이다.
언론개혁이 우리의 머릿속에 든 수구 이데올로기부터 걷어내는 데서부터 시작하듯이 여성문제도 남녀를 불문하고, 여성들이 더 열심히, 내 안에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있지나 않는지 감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것이 노동과 자본간의 전선 못지않게 여성주의의 전선도 보편적이고 인간 해방을 목표로 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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