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살펴보기1

-만파식적

검토 완료

최항기(flyturtle)등록 2002.11.09 16:05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삼국유사가 국보로 지정된 것은 올해 7월달의 일입니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본기(本紀)라고 높여주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을 모아 내었으며 주 내용은 전승설화와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나 삼국사기에서 빠진 역사적 사실들, 즉 단군신화나 가야에 대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기에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은 편입니다.


여기서 삼국유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안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 은유적인 표현, 미쳐 주목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파헤치고 싶은 욕심이 일어서입니다. 물론 삼국사기에도 그러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만 삼국유사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듯한 일도 과감하게 적어놓았다는 점에서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은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삼국유사는 민족적 정기를 잘 드러내는데 반해 삼국사기는 주체의식이 결여됐다는 지적을 했지만 삼국유사를 접하면 삼국사기는 필수적으로 있어야할 사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외의 사서도 물론 참조를 해야 될 필요성이 많은데 삼국유사에 적힌 이야기들이 너무나 함축적인 의미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기이2 하편에 나오는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로 골라봤습니다.


만파식적에 대한 기록


「신라 제 31대 신문대왕이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창건했다. 동해 바닷가의 작은 산이 감은사로 떠내려왔는데, 그 위의 대나무가 둘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었다가 했다. 신문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나타나 옥띠를 바치면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했다. 옥띠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으로서 한 쪽을 떼어 물에 넣으니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피리를 불면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잠잠해졌으므로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했다.」


삼국사기에도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고쳐지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비가 길면 날이 개이고,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평정하는 까닭에 이 이름으로써 국보로 삼았다고 하나 괴이하여 믿기 어렵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이 아닌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서에 적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파식적은 삼국유사의 신라 32대 효소왕 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데 '말갈에 잡혀갔던 화랑 부례랑이 살아 돌아왔던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파식적이라 이름했다.'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또, 38대 원성왕 때로 추정되는 해에 만파식적에 대한 얘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어 군사를 물리친다는 말을 듣고서 사자를 보내어 금 쉰 냥으로써 그 피리를 보자고 청했다. 왕은 사자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상대 진평왕 때에 그것이 있었을 뿐 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일본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천냥으로써 만파식적을 청해왔다. 내가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것을 돌려보내겠습니다. 왕은 그것 또한 전과 같은 대답으로써 거절하고 은 3천냥을 그 사자에게 주며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일본의 사자가 돌아갔다. 그 피리를 내황전에 간직했다.」


일연이 신라의 보물인 진평왕의 옥대와 착각을 일으켰는지 실제로 왕이 그렇게 말한 것인지 여기서는 만파식적이 신라 26대 진평왕 때부터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일단 만파식적이 시기상으로 처음으로 등장하는 신문왕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가 왜 생겨났는지 의문이 풀립니다. 신문왕은 30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즉위한 왕입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적은 편이었고 오히려 통일이후 기득권을 넓혀가려는 귀족들과의 알력이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신문왕의 장인인 김흠돌의 반란 때 많은 귀족이 참여했으나 이를 평정한 후 말단 가담자는 물론 이찬 군관까지 사전에 반란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처형합니다. 신문왕8년에는 중앙과 지방관리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실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달구벌(대구)로 도읍을 옮기려 했습니다. 반란에 이은 처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한 경주를 떠나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학교 국사시간에 의미도 모른 채 외워야 했던 '신문왕 = 왕권강화'의 실체인데 이 시점에서 만파식적이 등장했다는 것은 전지적인 왕권의 상징물이 필요했다는 얘기도 됩니다. 만파식적의 실제 여부보다는 만파식적이 언급되는 상황을 두루 돌아 보아야할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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