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의 애처로운 자기발전-누구도 이문열을 위해주지 않는다.

어느 제자의 '이문열 일병 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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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렬(phlip)등록 2002.12.17 14:24
먼저 조선일보 12월 17일자에 실린 '한 작가'를 지키기 위한 호소문을 읽어보자.

[시론] 폭력이 제도화되는가

어느 시대에나 정치적 견해에 따른 문화내용의 차이는 있었고, 그 차이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 또한 있었다. 하지만 치열했던 1980년대에도 그 대립과 갈등은 오직 문화안에 머물렀으며, 그 범위를 벗어나면 모두에게서 비난받았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들어 우리 문화에는 전에 없던 현상이 나타났다. 문화적 갈등, 특히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문화 내용 사이의 충돌과 대립은 여과 없는 언어적 폭력으로 표출되었고 나아가서는 집단적 테러로 자행되었다. 네거티브 문화의 불행한 변종이었다.

물론 그런 현상은 인터넷 문화로 대표되는 시대상황의 급변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 문화를 짓누르고 있는 폭력의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정치적 집단의 위장침투가 될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문화내용을 문제삼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투영된 정치적 견해를 겨냥한다. 그게 자신과 다르면 문화적 비판이 아니라 문화적 다수를 가장한 소수의 극렬 하수(下手)집단을 내세워 갖가지 폭력으로 상대를 말살시키려 든다.

그 전형적인 예는 이 나라의 한 작가가 작년 7월부터 그 일부는 아직까지 겪고 있는 모욕과 수난이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책을 인질로 삼아 반환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게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책 장례식이라고 하는 세계문화사에도 유례가 없는 해괴하면서도 끔찍한 해프닝을 벌였다.

그들이 일부 신문과 방송의 지원까지 받아 석 달에 걸친 요란스런 운동으로 모은 그 작가의 책은 정신병자의 비율보다 더 작았지만 상징적인 효과는 컸다. 자신이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어린 소녀를 상주 삼아 거창한 장례식을 치러 세상 사람의 이목을 끌었고, 그 뒤 1년이 넘는 지금까지 한 작가의 창작의욕을 끊어놓는 데도 온전히 성공하였다.

그들의 잔인한 폭력은 석 달 뒤 충북 옥천에서 한 번 더 가열하게 표출되었다. 먼저 그 작가의 책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불사르고, 풍장(風葬)이란 이름으로 나무에 매달았다. 까막까치가 파먹으란 뜻인데, 작가의 책을 인질로 삼은 폭력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 중에 하나는 자기 집 마당에 그 작가의 책을 흩어 소 돼지가 밟고 비도 맞게 하며, 필요하면 불쏘시개로 쓰다가, 그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거기다가 그들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은 더 있었다. 그같이 표독스럽고 집요한 폭력으로도 모자라 그들은 다시 형사 민사 합쳐 세 건이나 소송을 벌였다. 형사는‘혐의 없음’으로 결정나고 민사는‘기각’으로 결정이난 소송으로 1년이나 그 작가를 괴롭혔다.

구경하는 이들은 그 모든 일이 문화내부의 갈등과 대립인 줄 알고 있지만 이번 대선(大選)으로 그들 가해자의 성격은 분명해졌다. 특정정당과 후보를 지지하는 모임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정치적 성격을 명백히 했기때문이다. 곧 그 일은 그 정치적 집단이 문화에 가한 폭력이었다.

그런데 더 큰 걱정은 이제 그 폭력집단이 이 선거를 통해 제도화를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멀리 충북 옥천까지 찾아가 두 번째 책 장례식에도 참여했고, 형사 민사 고소에도 이름을 빌려준 그 집단의 대표격인 어떤 배우는 이제 당선가능성이 없지 않은 집권여당 후보의 간판 연설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작가의 책을 인질로 삼은 그 폭력의 다른 공범들도 모두 그 후보 지지모임의 열성적인 일꾼이 되었다고 한다.

만에 하나 그 후보가 당선이 되면 그들은 일등공신으로 논공행상에 들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바로 그들이 저질렀던 폭력의 정당화(正當化)와 제도화(制度化)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바로 한국적 문화혁명의 본격적인 전개이며,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지식인 수난사가 시작될 것이다.





딱 조선일보에 실릴만한 글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지키자고 하는 '한 작가'가 누구인지는 문학에 대해 관심없는 이들이라도 알 것이다. 이문열씨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이는 누구일까? 이문열씨의 친한 작가? 조선일보 문학담당기자? 이문열씨의 글방 문하생?

이문열씨의 친한 작가라기엔 글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 조선일보 문학담당기자가 썼다기엔 지나치게 정치색이 강하다. 조선일보는 알다시피 문화면과 정치면의 분리주의로 재미를 보는 신문이다. 더구나 기자가 이런 글을 썼다가는 '명목상인'대선중립조차 위험하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쓴 사람은 뻔하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전통인 도제시스템을 추종하는 어느 이문열씨의 글방 제자가 쓴 글일 것이다. 수준으로 보나, 생각하는 걸로 보나, 주군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 보나 딱 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조선일보에 실린 이 글쓴이의 이름은 '이문열'이란 말인가? 설마 한국에서 소설책 가장 많이 팔았다는 작가가 자신이 수난받은 이야기를 3인칭으로 이렇게 뻔뻔스럽게 늘어놓았단 말인가? 에이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해 보자. 글방이 몇년 되었음에도 원체 등단해서 스승만큼 필명을 날리는 제자가 없는 터라 제자 이름을 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는 그랬을 것이다. "스승님, 저 자들이 스승님께 가하는 모독을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정권이 정말 저 사악한 자들에게 넘어가면 스승님의 생명에 위협이 올 지도 모릅니다. 스승님 제 비록 3년 넘게 배웠음에도 여전히 모자란 글솜씨로 스승님께 질책받고 있지만, 스승님을 사모하는 마음만은 그 어느 제자보다 큽니다. 제게 스승님의 이름을 빌려 주시면 제가 스승님을 온몸 바쳐 구하겠습니다!"

모른다. 혹시 제자가 자신의 애정을 증명하기 위해 자해라도 했을 지. 그러니 마음넓기로 이름난 스승 이문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자기를 구해달라는 수준미달의 글에 자신의 필명을 빌려준 것을 허락한 것 아니겠는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오마이뉴스는 필히 이 내막을 취재해서 내 글에 연재기사로 실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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