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패러다임을 찾아서

생태주의(ecoism)와 Green God 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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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현(hhpaik)등록 2003.01.10 21:09
인간의 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만드는 것은 물이다. 물은 육체의 생명을 연장시키며 영혼의 생명을 정화하여 인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얼마 전 우리 영남 지방의 젖줄인 낙동강 물이 인위(人僞)에 의한 환경의 파괴와 오염으로 '낙똥강' 물이 되어, 그 물을 마시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 독극성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맑고 깨끗한 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 때 때마침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1급수의 물에서만 산다는 물고기 쉬리가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아직도 물이 맑아 사람들이 순수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희망과 위안으로 들떴다.

그런데 최근에 그 곳에 쾌락을 삶의 모토로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래프팅을 하는 등 자연의 훼손과 파괴를 가져왔다. 그 결과 그 물은 3급수 이하의 타락과 부패의 물이 되고 말자, 쉬리 떼들은 땅 위로 기어올라 하얀 배를 드러내고 들어누워 죽음으로 항변했다. "우리는 순수를 갈망하는 물의 존재이다. 항의한다. 항의한다. 우리들의 삶의 공간이 인간의 탐욕과 쾌락으로 훼손되고 파괴됨을..."이란 플래카드를 내걸고.

다행스럽게도 어떤 특정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겠다는 국가기관의 공시가 이루어지면 불행하게도 그 지역은 인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마는 비운의 인간 현실 속에서 동강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알려졌을 때 그것은 곧 아름다움의 파괴를 뜻한다는 것을 지성은 알고 가슴 아파했으리라. 인간의 탐욕과 쾌락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농업을 생산 방식으로 지닌 중세기의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세계상을 보여주었던 반면, 공업이란 생산 방식에 바탕을 둔 근대의 출현과 자본주의 생산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인간의 수단과 방법의 대상으로만 여기도록 강요하였다. 즉 근대에 있어서 자연은 곧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한 정복과 희생의 대상물에 지나지 않았다.

휴머니즘(humanism), 근대를 열어나간 르네상스 시대 역사 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가치관으로 제시된 인문주의(人文主義) 또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인간을 중세의 암흑으로부터 근대의 광명으로 인도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류가 문명의 위기 의식을 보이듯, 인간주의(人間主義) 또는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는 대상으로서 자연의 훼손과 파괴를, 주체로서 인간의 허무와 절망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역사는 진보, 발전한다'라는 믿음을 지닌 소위 이성주의자들은 현대의 이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고 공언한다. 자연이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오히려 인간의 수명은 더 길어졌으며 근대 문명의 바탕이 되는 화석 연료가 고갈된다 하더라도 그 대체 연료의 실용화가 가능한 상황에 도달했다고 하여 앞서의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은 살아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묘한 것이다. 사실로서의 인간은 어쨌든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가치로서의 인간은 가치의 상실로 인한 허무와 절망을 경험해야만 하고 생명에 대한 갈증과 허기는 달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28. 공동번역)

위의 인용문을 언어 표현의 표피 구조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근대의 인간들은 기독교적 전통을 지닌 서양사에서 볼 때 하느님의 피조체 중 인간만이 합목적적 존재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을 대결하여 지배하는 만유의 주체적 존재로 여기고 급기야는 자신 이외의 모든 존재를 그의 자아 실현을 위한 수단과 방법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파괴가 실현되었다.

그러자 인류의 선각과 세계의 지성은 우리들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세계관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라 하며 문명의 위기 상황에 대한 경각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이에 바탕하여 위의 인용문을 재해석해 보기로 하자. 성령에 감도되어 인간에 의해 기록된 성서의 표현과 이해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인류학자나 고고학자 그리고 문학유형학자들이 '하늘과 땅을 포괄하는 신화의 경우 그 언어는 표현과 이해의 면에서 신화 상징(mythological symbol)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화 속에서의 표현은 비록 실체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인간에 의해 그 원형은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의 이해는 전적으로 인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예컨대 서양 중세를 지배했던 우주관은 '땅은 펑퍼짐하다'란 성서 진술에 바탕을 둔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 인식이었지만 근대 이후 인간 이성의 발달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세계 이해가 가능해지자, 성서적 진술의 이해에 새로운 변환이 이루어졌으며 기존의 신앙관에 많은 변화가 요구되어졌다.

그 결과 성서적 진술에 대해 신화 상징적 해석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종말의 그 날과 같은 문명의 위기 상황에서 신학자들은 위 인용문에서 신화 비평의 방법을 원용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린다. 그것은 원래 신화 상징적 진술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전대의 이해와는 달리 '하느님의 창조적 질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여타의 존재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삶이 유기적인 관계에서 복된 삶을 영위하는 세계를 생태계라 한다. 지배와 복종의 삶이 아니라 서로간의 조화로운 질서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생태계를 지향하는 의식이 생태주의(ecoism)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욕(無慾)과 무위(無爲), 불가의 무상(無常)과 허무(虛無) 그리고 예수의 극기(克己)와 절제(節制)의 가르침은 우리를 생태주의의 삶으로 인도할 것이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계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 인용문에 보여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흔히 Green God(생명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 이라고도 명명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까치밥: 우리 조상님들은 가을날 감나무에 달린 열매 가운데 땅 가까이 있는 것은 땅 가까이 있는 것들이, 하늘 가까이 있는 것은 하늘 가까이 있는 것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온 세상이 눈이 쌓여 얼어붙은 겨울날 배고픔으로 신음하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위해 가지 끝의 감들을 남겨 두었다 하는데 이를 '까치밥'이라 한다. 참으로 소중한 생명의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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