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사회를 닮는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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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영(seeingsky)등록 2003.02.08 09:09
사회의 구성원들을 둘로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물론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겠지만,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라는 글에서는 노동자와 사용자로 나눌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흔히 말하는 이해 관계로 얽혀져 있다. 노동자는 되도록 적은 노동으로 많은 임금을 받길 원하고, 사용자는 되도록 적은 임금으로 많은 노동 인력을 사용하길 원한다. 그래서 이들은 적절한 절충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노동자와 사용자가 대등한 입장에 서기보다는 사용자가 우위에 서기 쉽기 때문이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 등장하는 은강 공장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그들의 노동에 대해 합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매스컴을 통해서 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를 접하기 때문이다. 체불 임금 문제나 노조 파업의 문제 같은 것들이 이에 속하는 것이다. 매스컴에 비추어진 이들의 모습은 약자의 모습이다.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관계가 대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 등장하는 '나'의 아버지는 이러한 관계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사랑은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법에 의해 강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생각에서 '나'의 아버지는 이미 현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법이 있어도 편법이 만연하고 법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도 보호받지 못하기에 법이 없는 세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사랑에 기반을 둔 '나'는 법으로 강요된 사랑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도 머지 않아 바뀐다. '나'가 접한 세상 역시 아버지가 접했던 세상과 다를 바가 없고 그 속에서 현실의 참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은강 공장 노동자들의 요구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법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이런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법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법밖에 없는 것인가. 이처럼 타율적으로 구속하여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인간의 격을 낮추어 버린다.

법은 우리 삶에 최소한의 것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가치마저 법에 의해 좌우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어김없이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문제는 사실 그들이 서로의 관계를 이해관계로 여기는 이상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원활히 해결되기란 어려운 문제이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면 '나'가 원한 것처럼 법에 의해 강요된 사랑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이런 문제의 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는 이 작품을 읽을 때부터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주인공 '나'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답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행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격을 스스로 낮추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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