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지혜의 사랑(philoso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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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현(hhpaik)등록 2003.02.18 11:01
지난 어느 일요일 밤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삼민투위 사건'>(KBS TV)을 시청한 바 있다.

삼민주의(三民主義), 즉 민족과 민주와 민중의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여 조직된 '삼민투위'는 수도 서울의 어느 공관을 점거하고 농성하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집권과 그 군부독재체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자 한 의도가 놓여 있음을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거사는 3일째 되는 날 강권에 의해 실패되고, 참가자들은 모두 구속되고 만다.

이 사건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재판의 문제다. 당시 삼민투위의 위원장이었던 함운경군이 구호를 외치며 재판정에 끌려나왔다.

"피고인, 당신의 하숙방에서 마르크스의 책자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대가 레프트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검사의 준엄한 문초가 시작되었다.

"나의 하숙방에는 그 책들뿐만 아니라 강철수의 만화책들도 있다. 만약 내가 마르크스의 책을 읽었다고 레프트라 한다면, 바이블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기독교도여야만 하느냐?"하고 피고인 함운경은 검사의 억측에 의한 의도적인 오류와 모순을 당당하게 지적하였다.(이하 생략)

어찌되었던 함운경은 당시 재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형의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 프로의 제작자가 10여 년 전 당시의 재판장이었던 판사를 찾아가 당시의 재판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당시 재판의 판결이 과연 법과 양심에 따른 올바른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역사과정적 흐름으로 볼 때 내가 유죄라 판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머리가 허연 노인네가 요상하게 웃으면서 과거를 추억하며 술회했다.

TV에서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지닌 사람의 증언에 관한 것은 음성만으로 녹취(錄取)하거나 화상(畵像)하더라도 실루엣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노인네는 화상에 직접 나타나서 못난 자신의 탓이 아니라 시대의 탓이라 변명하며 당당하게(?) 과거를 증언했다.

세월이 흐르면 옛이야기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했던가, 사노라 힘들어, 아니 의식이 혼미하여 오랜 간 만나지 못해 소원했던 옛 친구를 만났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찾게 되는 부산민주공원에서 전시 중인 '친일예술인, 그들의 작품전'을 보러 갔다가 함께 대학 다녔던 호철이란 벗을 만나 보수동 헌 책방 골목의 중부교회 근처에서 국밥 한 그릇에 옛 정을 말았다.

"그 때가 아마 80년대 전반 '전통' 시절일 끼다. 내가 붙들리가 이곳 저곳에서 취조를 많이 받았다 아이가."

이미 20년이 지난 과거사를 이야기할 때 그의 모습은 옛 후유증으로 다소 쇠잔해 보였지만 의기는 그대로였다. '하나로'란 담배를 피워 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79년 부마사태 때 못 잡아들인 놈들이라 하여 마저 잡아들인 긴 기다, 알고 보이까네 '부림 사건'이라 하는 기. 그 때 우리를 위해 젊은 재야 변호사들인 김광일씨, 이흥록씨 그라고 노무현씨 등이 변호해 줬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제. 하기사 그 때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나아가는 처지였으이까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79년 '10.16' 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주례에 끌려온 그 놈의 미결수 18번 붉은 딱지가 자꾸만 떠올랐다. 독방의 창밖으론 달이 가고 있었고, 또 오동잎 잎새 사이로는 달이 지고 있었다.

"검사가 우리 집을 수색하니 요상한 책들이 많더란 기다. 창작과비평사, 민족학교, 청사(靑史), 실천문학, 돌베개, 사상계, 풀빛, 광민출판사 등 꼬림직한(?) 출판사의 책들 중에 판매금지된 이영희씨의 『전환 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를 내놓고 내를 이상한 놈이라고 문초하더라. 그 놈아가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읽어봤는지도 의심되더라 카이까네. 그런데 한 두 달쯤 지났나, 판사가 재판을 하는데 나를 보고 무죄라 언도했다 아이가. 인자 콩밥 묵지 말고 집에 가서 사제밥 묵어도 좋다는 뜻인 기라. 아마도 판사 어른이 그 간에 그 '판금' 책들 읽어 보이까네 검사놈 주장과는 달리 별 끼 아이더라 생각하고 판결한 기라. 집에 갈 끼다, '룰룰루' 하고 있는데 변호사 형님들 오시디 '집에 못 간다. 구형 10년 이상이모 관례로 1년은 있어야 되는 기다.'라고 말씀하시디, 검찰이 항소를 했다 안 하더나. 시절이 시절인 만치 결국 형을 받아 옥살이를 해야 됐구마. 시절이 평정되고서야(?) 사면을 받아 세상 구경하게 됐는데, 두부를 쪼개고 나이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일심 때의 판사라 수소문하여 찾아가니깐 대구에서 변호사 일을 하시더만. 인사를 드리니, 웃음 지으며 '수고 많았제, 녹차다, 한 잔 마시라'하고 위로하더라. 그 때의 무죄판결로 법복이 벗겼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구마"

그 날 순대 국밥 집에서 옛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소주가 네 병이나 비워졌고, 밤은 깊어만 갔다. 하지만 어둠을 즐기기만 했다. 그 옛날처럼 어둠이 두렵지만은 않았다. 내일은 반드시 또 다시 해가 떠오를 테니깐…….

갈릴레이(Galileo de Galileo 1564-1642)에 관한 일화가 있다.

서양 중세 말 근대 초,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수학자이며 철학자로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피사 출생의 갈릴레이는 1632년에 《황금 측량자 Saggiatore》를 집필하여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고, 25-29년간에 《천문 대화: 2개의 우주계, 즉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설에 관한 대화 Dialoge spora i due Massimi systemi de Mondo Tolemico, e Copernico)》를 저술하여 32년 검열을 거쳐 출판했다. 이 제작이 문제가 되어 33년 로마로 소환되어 종교재판을 받고 지동설을 버릴 것을 서약하고 풀려난다.

중세적 이성의 한계에 바탕하여 오직 신학적 도그마(dogmatism)만이 지배하던 당대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입각한 성서의 독서와 세계의 이해에 어긋나는 지동설의 주장은 용납될 수 없어 이의 주창자들은 당시 바티칸의 교황청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분형(焚刑)되어야만 했다.

갈릴레오는 한 존재로서의 본능적 의식과 태도로 자신의 이성을 부정하고 살아야만 했기에 자신의 주장을 무화한 셈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 삶과 학문적 업적을 기리어, 그 때 베드로 광장을 빠져나가면서,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라고 했다 하며 그를 미화시킨다. 그 후 그는 피렌체의 교외에서 여생을 유폐생활로 보내게 되는데, 어찌되었던 진리에 대한 증거보다는 존재의 목숨을 더 중히 여긴 자로 진리의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반면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 놓은 인물도 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65년에 가톨릭의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 72년 사제가 되었으나 76년 이단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자 수도원에서 나와 각지를 편력했다. 91년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베네치아에서 이단으로 고소되었으며 93년 로마로 이송되어 8년간의 옥중생활 끝에 화형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설을 바탕으로 우주에는 고정된 중심이 없다고 하고, 끝없는 공간에는 수많은 천체세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사상의 자유의 역사』(J.베리, 박영문고. 1974)의 p.64-p.76을 재구성하여 극화한 것이다.

배경: 중세 말 근대 초, 로마 교황청 베드로성당 앞 광장.
무대: 무대 중앙에 종교심판소의 고위관리가 근엄하게 앉아 있고 우켠 상단에는 기름가마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무대에는 로마의 시민들과 귀족들 그리고 사제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음악소리 울리며 무대 좌켠에서 지친 몰골의 죄수 브루노가 철기병사들에 의해 끌려나온다.
재판장: (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엄하다. 무릎을 꿇지어다. 죄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추종하여 신성모독(神聖冒瀆)을 자행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서슴지 않았으니, 실로 그렇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브루노: (엎드려 존경을 표하고는 꼿꼿한 자세로) 우리는 르네상스라는 사상의 해빙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미 낡은 교회의 카리스마와 도그마로는 새 시대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재판장: (버럭 화를 내며) 아니 이 놈아, 네가 주장하는 '지동설'에 관한 문초다. 이 놈아, 죽고 싶으냐?
브루노: (병사들의 뿌리치고 우켠 상단의 기름가마 옆에 다가가 선다.) 나는 죽으리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으리다.(...이하 생략...)

앞서의 두 인물은 공히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를 열어나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지만 그들에 대한 인간학적인 면에서의 역사적 평가는 상반되는데 이에 대한 인식은 독자 여러분들의 몫으로 돌린다.

세상이 혼탁하여 부패하고 타락할수록 청정(淸淨)의 가치에 대한 열망은 커진다. 마치 '고향은 멀수록 가까이 다가든다'는 말처럼. 오늘날 '삶의 철학을 지녀야 한다.'고들 한다. 그것만이 허무와 절망 속에 있는 우리에게 가치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어쩜 사실적 차원에서의 삶인 '생존'과 가치적 존재로서의 삶인 '생활'의 그 사이에서 일상적 진동을 경험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앞서에서 소개한 두 재판관의 삶과 갈릴레이와 브루노의 삶을 대비하면서 삶의 의미를 묵상해 본다.

철학의 비조라 하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소크라테스(B.C469-399)를 든다. 그는 고대 아테네에서 자기 자신의 영혼(psyche)을 소중히 여기는 필요성을 역설하고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날마다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며 지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독배를 들고 사망했다. 그의 삶의 철학(哲學, philosophy), 즉 지혜의 사랑(philosophia)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B.C427-347)이 저술한『플라톤의 '대화'편』에《에티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그리고 《파이돈》등의 산문으로 남아 전하고 있다.

특히 《파이돈》에 그려진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평정청정한 태도는 철학자의 자세를, 지혜를 사랑하는 이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삶의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자신의 생명조차도 기꺼이 바친 소크라테스의 지혜의 사랑("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의 벗의 최후였다"- W.듀란트, 『철학 이야기』,고려대학교 출판부, 1975)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방송 프로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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