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영화제

2003년 2월 13일-16일, 서울아트시네마

검토 완료

이종열(suzaku)등록 2003.03.04 13:19

미래의 명감독을 미리 발견해본다는 점에서 좋아했던 대학 졸업영화제를 실로 오랜만에 찾았다. 지난 2월 14일, 그간 계획표는 짜놓았으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가보지 못했는데 오늘 무조건 영화제 쪽으로 향해 가본 결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전 차림새는 단정되고 화려했다. 전공 섹션별로 80편에 이르는 다작이 구미를 당기게 했으며, 무엇보다 상영관 조건이 단순 졸전이 아닌 작은 영화제의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게다가 '영상원'이라는 네임이 작품 퀄리티에 대한 기대까지 들게 했다.

먼저 접한 작품군은 '시나리오 전공' 전문사들의 졸작이다. 시나리오 전공자 작품이라선지 연출력은 많이 떨어졌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나리오마저 문제가 많았던 것엔 인상이 찌푸려졌다. 졸전 다운 얼마만큼의 결실이 기대됐음에도 이렇다한 문제작은 없었다.

감정 과잉상태의 여자, 박정재 연출

이 중 <감정 과잉상태의 여자>(박정재), <열대의 밤>(이채원), <일루와>(조마리)가 가장 문제다. 이들 작에는 출산의 고통을 느낀 성과가 아닌 시간에 쫓겨 내놓은 듯한 무성의함으로 가득하다. 토끼장에 갇힌 토끼, 이를 놀려먹는 여자, 다시 이를 억압하려는 남자, 이런 둘을 철망 뒤에서 골려먹는 아이들이라는 구조를 통해 억압의 관계를 그린 <일루와>는 그 순진한 발상과 단순한 표현에 나는 "일루와!"를 외친다.

<열대의 밤>은 취업문제로 고민하는 한 사회초년생의 일상을 건조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문제의식을 좀 더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이 생각할 수 있는 선에서 그쳐버린 점이 아쉬웠다.

<감정 과잉상태의 여자>는 대학 습작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인 뮤직비디오식 자극적 이미지 나열이 강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심리적인 부분에 신경 쓴 바는 보이나 연출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태이기에 모호하게 읽힌다. 그리고 시나리오 전공자에게서 이런 작품을 보는 것은 좀 반갑지 않다.

한편 <잘자라 우리아가>(이선정), <일요일 오후 5시 15분>(유정은), <오란다>(이경아)는 그나마 참신성을 볼 수 있던 작품이었다. 세탁기에 빨면 씻길 수 있다는 아이의 단순한 생각이 갓난 동생을 죽게 만든다는 <잘자라 우리 아가>는 그 발상은 뛰어난 듯 하나 이를 작품으로 보다 발전시키지 못했다. 어른의 상상력에 머무른감이 있으며 엽기적인 깜짝 효과만 도드라져 보인다. 초반에 볼 수 있는 인형을 빨래줄에 매달아 말리는 등의 몇몇 상징적인 장치는 아이의 상상력이 빛나는 부분이었다.

<일요일 오후 5시 15분>는 <열대의 밤>이 놓친 부분을 조금 더 표현해 보인다. 덤덤한 일상과 이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죽음이라는 극적인 순간이 이 영화에는 조화로이 담겨져 있다. 잉크가 영상화로 완전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연출자의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오란다'라는 괴물고기를 아기로 생각하며 교감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오란다>는 시나리오 전공생 졸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보인다. 일단 이 영화의 우수함은 단편영화, 학생영화에서 보면 즐거울 참신함이 있다.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이를 살아있는 세계로 만드는 시나리오 능력이 보인 것이다. 이 영화에는 특히 박기용 감독의 <낙타(들)>에 주연으로 출연한 바 있는 박명신이 여주인공을 맡아 기이한 세계를 설명해 보인다.

택시기사 택시를 타다, 조정호 연출

10여분 휴식 후 본, 연출전공 섹션은 성과의 작품들이 많았다. 먼저 <택시기사, 택시를 타다>(조정호)는 이제까지 본 대학 졸전 작품 중 가장 완성도와 주제가 있는 작품이었다. 이 시대의 외로운 전사인 가장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연출의 안정된 깊이를 보여준다. 기주봉(베떼랑 연극·영화인. 종종 대학생 작품에 선뜻 출연하신단다)씨의 호연 덕을 보기는 했지만 남루한 현실을 잡아내는 연출자의 솜씨는 이미 수준급이었다. 특히 택시를 팔기 전의 택시기사의 심경을 담은 후반 장면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지축기지로 보이는 곳. 원경에 북한산, 그리고 그 가까운 곳에 전철이 지나간다. 택시기사이자 가장인 남자는 소주를 마신다. 한 프레임 안에 여러 가지를 담은 훌륭한 미장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재네 집에서 하룻밤>(함영준)도 안정된 호흡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욕망과 비루한 일상을 담은 이 작품은 한예종 스승 중 홍상수 감독을 연상케 하는데 연애심리, 특히 마지막에 두 남녀가 결국 살을 맞대는 재치있는 연결고리 부에서는 탄성과 웃음이 나게 된다.

<굿바이 데이>(이정범)는 좀 진부한 내용이지만 청춘의 한 자락을 그런대로 잘 잡아냈다. 여기 주인공은 <고>의 쿠보즈카 요스케를 연상시킨다. 한편 바보 연기가 재미있었다.

<여름이야기>(안주영)는 정말 신나게 즐겼던 작품이다. '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회초년 여성을 통해 외모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고민과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이 영화는 여러 에피소드 속에서 여성심리가 재미있게 읽힌다. 지하철 자리잡기, 다이어트 교실에서의 감언이설, 타이트한 바지 등 공감할만한 내용들이 배꼽 빠지게 했다가 가슴 쓰리게 만든다.

여름이야기, 안주영 연출

한편 영화는 엽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여주인공을 보여주는데 그런 그녀의 행동은 단순 괴행동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 여성 심리를 섬세하게 반영한다. 지하철에서 울고있는 여학생을 핸드백으로 치고 내리는 장면, 인형이 볼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장면, 강간의 위협을 느끼다 오인임을 아는 장면, 언어폭행으로 못살게 굴던 회사 동료남을 날라차기 하는 마지막 상상장면까지. 값진 엽기 퍼레이드는 끝없이 펼쳐진다.

이 모든 것은 여름 역을 맡은 전수지의 연기 공이 크다. 귀여운 구석을 온 몸에 숨기고 다니는 그녀는 정말 브리짓 존스 만큼의 매력이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의아스러운 점! 이런 여주인공이 '아줌마'라는 소리를 듣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하철에서의 그 남자, 눈이 삐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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