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조폭'문화

'조폭'문화가 친근한 이유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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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csk6633)등록 2003.03.23 15:35
만약 ‘경실련’이란 단어가 신문이나 어떤 공식적인 매체에 쓰이게 될 경우, 보통 그 본디말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란 말이 보충설명되어진다. 경실련은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줄임말이 너무나도 자주 사용되어 대중들에게 굳이 본디말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조폭’이 바로 그런 말이다.

‘조직폭력배’의 줄임말인 ‘조폭’이란 말은 국내 영화 흥행의 주요 아이콘이 된 지 오래이고, 이제 우리 나라의 문화관광부 장관도 서슴지 않고 공론화된 자리에서 발언하는 시사어(?)가 되었다.

도대체 ‘조폭’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우리 안에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을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은 친근하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조폭이 친근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들을 차분히 살펴보자.

첫 번째 이유는 ‘사투리’를 사용하는 집단이란 점이다.

‘조폭’은 양면성을 가진 우리문화의 코드이자 아이콘이다. 일반적으로 ‘조폭’하면, 조직화된 깡패집단 그러니까 비합법적인 무력을 수단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을 연상한다. 그런데, 한국의 ‘조폭’은 비슷한 생태적 운명을 지닌, 서구의 마피아, 일본의 야쿠자와는 분명 다르다.

한쪽 면은 분명히 사시미 칼과 몽둥이 같은 각종 흉기로 조직적인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잔악무도한 범죄집단이지만, 다른 한쪽 면은 구수하고 정감가는 사투리를 구사하는 다소 촌스러운 존재들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서방파니 양은이파니 하는 실제 큰 ‘조폭’ 조직들과 대중매체에서 가공해 낸 ‘조폭’ 집단들은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을 축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조폭’의 언어는 그들이 표준어를 사용하는 서울 혹은 사투리 억양이 비교적 적은 충청, 강원 권에서 활동한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경상도, 전라도의 사투리를 근간으로 한다. 그 사투리에 ‘조폭’ 특유의 자조적인 욕설이 곁들여지면 아이러니하게도 공포감이나 위협감을 느끼기는커녕 친밀한 유대감에 도취되고 만다.

사투리는 촌스러움을 외피로 하고 친근감을 내피이자 모태로 한다. 촌스러움은 때때로 순수함으로 위장되거나 오해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촌스러운 쌈질장이는 그 위장된 ‘순수한 치기’로 인해서 가끔씩 면죄부를 받기도 한다. 순수한 치기는 아마추어다. 우리는 아마추어에게 상당히 관대하다. 덕치적인 삶의 강령에 물들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폭’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친근감은 익숙함을 반영한다. 그 익숙함은 주로 유년시절에 많이 형성된다. 대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유년시절의 경험 속에 구수한 사투리는 친숙하게 우리 안에 스며들어와 안착하였다. 특히, 성년기를 대도시에서 보내게 되면 정서적으로 친근감과 거리가 먼 합리성과 효율성이란 차가운 이성을 좌표로 삼는다. 그런데 잠시 그 좌표 곁의 비이성적 친근감에 곁눈질을 해보기도 한다. 쉽사리 곁눈질 할 수 있는,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의 것으로는 아무래도 사투리가 제 격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투리를 친근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투리는 그저 방언일 뿐이다. 고도로 물질화된 사회의 양식과 문화에 상치되는 촌스러운 순수함은 아직 도시화가 덜 된 시골의 정서이지 사투리가 아니다. 사투리는 폭 넓은 의미에서 지방어다. 지방이 다 시골은 아니다. 서울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미 도시화된 지 오래된 중소도시를 포함한다. 중소도시 혹은 지방의 대도시에서 사투리를 구가한다고 모두 다 순수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태생이 지방이라서 사투리를 쓸 뿐이지 사투리를 쓰는 이들이 모두 순수할 것이란 가정은 결국 ‘조폭’집단의 미화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두 번째 이유는 ‘의리와 서열’을 중시 한다는 점이다.

유학시절의 이야기다. 한 유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는 여학생들을 가끔 도와주다보면 정말로 화가 나!” “지들이 뭔데, 내가 도와주면 그저 선배한테 도움을 받은 걸로 생각을 해야지. 글쎄 나중에 나한테 밥을 사주겠다나? 건방진 것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순수한 보답으로 생각을 왜 안하지?”

그러자 “그게 순수한 거야? 결국 기브 앤 테이크에 집착하는 냉정한 거지.”

그는 내가 보기에 가부장적 서열문화와 의리(?)를 중시하는 영락없는 한국적 마초 남근주의자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선배라는 허접한 지위 하나만으로 본국과 수백만리 동떨어진 그 곳에서도 위계질서를 찾고 폭력과 폭언을 일삼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전두환과 장세동의 의리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란 콘트라 사건 때에 보여진 대통령 레이건에 대한 노스 중령의 의리보다 더 값지다고 평가를 받는 장세동의 의리. 그의 전두환에 대한 의리는 조직에 있어서의 충성의 표본 그리고 의리의 표본으로 되어있다. 한층 더 나아가 ‘조폭’들의 의리 미담을 굳건히 해주는 현실 속의 큰 사례로 남아있다.

의리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도리란 다시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이란다. 사전적인 의미 즉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의리란 결국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인 보편적 행태’를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배워온, 체득한 지켜야 할 바른 것들이 어떤 것들일까? 초등학교 고 학년생한테 물어봐도 쉽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약한이를 도와주고요, 웃어른을 공경하고요…음 사회정의에 앞장서구요…또….”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자. 상식선에서. 과연 장세동의 의리가 위의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인 보편적 행태’인가? 잘못된 수장의 잘못을 은폐하고 감싸는 행위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가? 답이 쉽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리 즉 장세동의 의리는 지극히 ‘조폭’들의 의리에 머물고 만다. ‘조폭’들의 의리는 서열문화 속에서 잉태된 저급하고 이기적인 유산일 뿐이다.

서열문화란 결국 수직문화를 말한다. 그리고 그 서열과 수직의 포맷은 정실주의를 배태한다. 그 배태된 정실주의는 결국 패거리주의라는 바이러스로 온 사회안에 유포된다.

‘조폭’적 서열의 마디들을 굳건하게 지탱시켜주는 핏줄은 극단적인 쇼비니즘(맹목적 충성주의)이다. 그리고 그 핏줄 속의 모세혈관에는 자신이 속한 집단 외의 타집단에 대해 경원심과 적대감을 가지는 원시감정인 에스노센트리즘(Ethnocentrism)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말로 해석하자면, 자민족중심주의다.
그러나 여기서 자민족은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계층과 집단들에 적용된다.
이 자민족중심주의가 팽배해지면, 나치들이 유태인들에게 행하였던 홀로코스트 같은 행위를 도출하는 극단적인 배외주의(排外主義)도 발생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이러한 정실주의인 패거리 연대감을 쉽게 맛볼 수 있다. 당장에 자신들만의 서열 유지에 급급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조직인 검사집단부터 극우논리로 경도된 조선일보와 그 곁다리 곡학아세 지식인들.

그리고 꼭 그들만 욕할 수는 없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이미 우리사회의 어떤 조직이든 이러한 배타적 패거리 근성이 젖어있지 않은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패거리 정실주의는 배움의 깊이와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우리 곁에 친밀하고도 나른하게 스며들어온 일종의 증후군이라 볼 수 있다.


‘조폭’문화를 은연중에 즐기고 숭상하면서도 실재하는 ‘조폭’이나 그 똘마니들에게는 차가운 시선을 보이는 것이 우리네의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그런데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그 실재하는 ‘조폭’들은 사실상 여기서 논한 ‘조폭’문화의 주인공들이라기 보다는 단지 그 지류의 한 형태이다. 가장 낮은 자의 형태로써 말이다. 좀 더 높은 형태, 바꾸어 말하자면 법의 보호를 받거나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진 선 상에서 그 지류를 형성하는 다양한 ‘조폭’문화의 군상들과 집단들은 각기의 패거리 주의에 연연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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