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진길

(양심수를 위한 고난의 행진 13일-20일 일지)

검토 완료

김소중(sjspy2000)등록 2003.04.11 21:19
고난의 행진 13일째 일지

오늘의 목적지는 충주입니다. 귀래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서울, 경기도, 강원도를 거쳐 이제는 충청도에서 약 10여일간의 순례가 시작됩니다.

강원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지나서 고개를 하나 넘으니 오른편으로 남한강 줄기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강줄기는 충주 시내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걷는게 힘들긴 했지만, 서늘한 강바람과 시원한 경치 때문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특히 쉬는 시간에 농담을 많이 했습니다. 서로가 힘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농담은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목계나루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기동(하남청년회 35. 어제 새로 참가하신 분입니다.)님이 화장실이 없어서 강변을 바라보며 오줌을 싸는데 뒤에서 보니까 오줌발이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명원님이 '봄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오줌발'이라고 시한수를 읊으니까 그때부터 각자가 알고 있는 야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봤자 영화 '몽정기'에 나오는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굳이 이 공간에 올리지 않겠지만, '딸미'OOO님과 송OO님은 빨리 순례단에 결합하셔서 단장님의 입을 막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농담은 목행대교 아래에 있는 강변에서 있었습니다. 쉬는 짬에 단장님이 제안해서 순례단원 모두가 김소중님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지난번에 보낸 문자가 너무 무미건조했다는 평가가 있어서 이번에는 '김소중'이라는 이름으로 3행시를 지어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잘된 것은 나중에 등수를 매겨서 시상을 하기로 했습니다. 상품이 뭐냐고 물으니까 단장님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오늘로 6일째 순례를 함께 하고 있는 지웅님이 보낸 3행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소중씨는 김장할때도
소-주를
중-간에 넣으신다면서요?

단장님의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씨 아중마
소-문이 자자하더이다
중-중증 알콜중독 이라면서요...

명원님의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를 보니
소-주가 생각 나는군요. 어써빨리 나아서 나
중-에 소주한잔해요...

모두 술을 주제로 한 3행시였습니다. 그래도 저번에 보낸 문자에 비해서 많이 발전한 것입니다. 몇분 후 전화가 왔습니다. 김소중님이었습니다. 문자를 받고 너무 웃겨서 봉합한 부위의 실밥이 터질 뻔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단장님은 '김밥부인 옆구리 터졌구만'이라고 하시더군요.

기쁜소식이 있습니다. '고난의 행진'의 활동이 '한겨레 21'에 기사화되었습니다. 순례단원들은 한겨레 21을 보면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단장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기사는 우리가 몸으로 쓴거다.'. 13일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오늘따라 행진을 하는데 경적으로 격려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순례단은 '이탈자'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3박 4일동안 순례단과 함께 동행취재한 김수병 기자님에게 이 공간을 빌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자동차 밧데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오늘 점심은 어제 먹다 남은 밥으로 때웠습니다. 사발면과 묵은 김치, 통조림을 섞어서 끓이니 맛이 별미였습니다. 그래도 단장님의 '나와바리'를 벗어난 티가 금방 났습니다. 당장 오늘 잠잘곳도 미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어떻게 연락이 되어서 충주지역 시민사회 단체분들이 순례단원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습니다. 저녁에는 이분들과 간담회를 했습니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참가해 주셨습니다. 순례단의 여정과 계획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매번 올리는 일지의 끝 마무리가 어정쩡 하다는 지적이 있어서 오늘의 마무리는 순례단에서 항상 외우는 주문을 끝으로 오늘 일지를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모든 양심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행진거리 : 34km
도보행진 : 6명

고난의 행진 14일째

여기는 음성입니다.

순례단 식구가 밤새 늘었습니다. 학생2명이 새로 합류하였고 일산시민 박용주씨가 아들 민수와 함께 합류하였습니다. 민수는 열살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닌답니다. 아버지 용주씨의 강권으로 학교를 무단결석한 채 일요일까지 걸을 생각이랍니다.

충주를 출발해 음성까지 걷는 행진에는 민주노총 충주지구협의회 조직차장님과 사무국장님이 충주시계까지 동행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민족시인' 문천관님이 순례단을 즐겁게 해주셨습니다. 문천관님의 시는 몹시 독특하여 본인에게는 큰 감명을 주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선 전국연합 민생위원장이신 김홍렬님과 같은 과라는 단장님의 조심스런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하여 자칭 민족시인..,

동참계층이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양심수와 청년학생이 주축이 되어 장애우(용주씨는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채로 걷고 있습니다), 꼬마, 실업자, 비정규직노동자, (종합)예술인, 종교인, 등등......

운전을 해주시는 윤상윤님이 오늘 점심식사 시간에 한 건했습니다. 차량에 장착한 인버터로 밥을 짓던 전기밥솥이 고장나서 모두 굶어야하는 상황에서 식당마다 찾아다니며 밥을 사오려 했지만 밥만 파는 식당은 없었답니다. 그래 생각다 못해 무조건 민가로 찾아들었는데 마침 그 집이 음성군 농민회 총무님 집이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갓 지은 밥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해결한 후 단장님이 모처럼 장시간의 휴식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오전에 강행군을 하여 여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잠이 부족한 단장님도 한번 신나게 주무시려는지 노상에 침낭까지 펴고 누우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단장님은 발편잠을 주무실 팔자가 아닌가 봅니다. 거의 5분간격으로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입니다. 단장님은 우리가 충청도로 접어들어서인지 충북지역 정보과 형사들이 자꾸 전화를 걸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 우리가 알고있는 단장님 답지 않게 전화를 공손히 받았습니다. 다음은 단장님의 통화 내용입니다.

첫 번째 전화 : "양심수 점 넷을 검색해 보세요. 양심수는 영어입니다. 영어로 와이에이엔쥐............"
두 번째 전화 :" 정보과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십시오. 도청도 하고, 미행도 하고, 프락치도 심고 해서 정보를 캐내는 것이 당신들 임무 아닙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책상에 앉아서 전화질이나 하라고 국민들이 당신들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몸으로 뛰세요. 우리처럼..." 참으로 교훈적인 통화내용입니다.

행진도중 삼광섬유에서 일하다 농촌으로 귀농하신분이 우리를 보고 사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먼저 인사를 건네 오는 사람들이 많은 하루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힘이되지요. 오늘 저녁은 계획을 변경하여 음성에서 묶기로 하였습니다. 단원들이 불어서 천막의 수용인원을 초과했는데 마침 음성 사시는 차흥도 목사님께서 숙소를 제공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수련원으로 쓰이는 숙소는 깊은 산골에 있습니다. 산골짝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엔 유난히 별이 아름답습니다. 참 고즈넉한 밤입니다.

행진거리 : 30 Km
행진인원 : 10명

고난의 행진 15일째 (4월 5일)

여기는 청원군입니다.

10시간을 걷다보면 가장 힘들 때는 마지막 30분입니다. 9시간 30분동안의 피로감이 30분동안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그래서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무릅에 통증이 생기는 시점은 대부분 마지막 30분입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가야하는 숙소까지 15Km정도가 남은 것입니다. 순례단원들이 모두 망연자실해 하면서 단장님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속도를 냅시다"그러는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모두들 아주 미친 듯이 걸었습니다. 계속 그렇게 걷고 있는데 단장님이 멈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멈춰서 차를 타고 갑시다. 하루이틀 걸을 것도 아닌데 이렇게 걷다가는 다음날을 기약할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를타고 숙소까지 왔습니다. 오면서 정말 판단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가 아찔할 정도로 멀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점심식사때 한 건 올렸던 윤상윤님이 오늘은 죽을 쒔습니다. 밥통 용량에 초과하는 쌀을 넣는 바람에 밥이 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꽁치찌개에 쌀을 섞어서 죽을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어죽'이 탄생했습니다. 모두들 예의상 "아주 맛있는데요"라고 말은 했지만, 먹는게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순례단원의 배를 체워 준 것은 '두레촌' 호박엿이었습니다.

오늘도 문천관님이 순례단원을 즐겁게 해줬습니다. 문천관님은 손에 염주를 들고 다니십니다. 걷다가 길에서 주웠다고 합니다. 염주를 돌리면서 '반야심경'을 중얼거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형이 '진관'스님 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기 이름이 '천관'이라고 합니다.

걷다가 순례단이 조용해지면 노래를 불러줍니다. 아주 독특한 창법입니다. 자신은 아주 격정적으로 부르지만, 듣는 사람들은 다리에서 힘이 쫙 풀립니다. 박용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처음에는 즐겁다가, 듣다보면 짜증이 확 솟구친다."

여기 충청도는 벌써 목련꽃이 활짝 폈습니다. 들판에는 불을 놓아서 연기가 가득합니다. 경운기로 밭을 가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따라 웨딩카가 거리에 많았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에 상황실장님과 단장님이 대화를 주고받다가 오늘 결혼을 한 전말봉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신혼여행을 '고난의 행진'으로 오라고 그러면 어때? 그러면 언론에서 관심 많이 가질텐데 말이야...."
"그럼 첫날밤은 어떻게 하죠? 천막에서 자야 하나요?"
"그런건 걱정 않해도 돼. 알아서 하게 되있어."

어쨌든 단장님은 전말봉님의 아내되는 분의 건강을 물으셨고, 순례단 명의로 결혼 축하글을 꼭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말봉님과 우의정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축의금은 없답니다.)

그동안 고난의 행진 전기간을 수행하면서 물집한번 잡히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샀던 명원님의 발에 드디어 부상이 생겼습니다. 원래부터 체질이였다느니, 뺀질거려서 그랬다느니 말이 많았지만, 이 모든 의혹들을 불식시킬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생긴 것에 명원님은 상처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연신 싱글벙글 이었습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야'에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상처가 났네요. 피까지 나는데요? 아프지 않으세요?"
"별로 아프지 않네요."
"그런데 왜 자꾸 웃으세요? 정말 안아퍼요?."
"예."
아무래도 체질인가 봅니다.

오늘의 이탈자는 경희대에서 오신 이현열님입다. 그리고 상황실장 윤용배님과 iTV, 그리고 하영옥님의 형님이 새로 결합하셨습니다. 저녁이 되어서는 청주청년회와 성남터사랑청년회, 그리고 경원대 학생이 참가하였습니다. 분당 출발이후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걷게 된 것입니다.

오늘 행진 거리 34Km 참가인원 10명

고난의 행진 16일째 (4월 6일)

드디어 천리를 돌파했습니다.

지난달 23일 서울구치소를 출발한 순례단은 보름만에 400여Km를 걸어왔습니다.

여기는 청주교도소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교도소에 도착하면 순례단은 천막을 칩니다. 오늘은 천막이 두 개입니다. 청주지역에서 천막을 하나더 공수해왔습니다. 순례단원만이 아니라 청주지역의 일꾼들도 천막에서 잘 생각인가 봅니다. 천막 주변에서는 청주지역 일꾼들이 소속 단위별로 결의대회도 하고, 뒷풀이도 하고 있습니다. 순례단원들은 모두 피곤해서 지금은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숙소에서 청주교도소까지 청주지역 일꾼들이 동행했습니다. 청주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김소중씨 동생내외가 주말을 이용하여 청주까지 먼 발걸음을 해주었습니다. 사람도 많고, 교도소 도착시간까지 여유도 있고 해서 오늘은 행진중에 유인물을 돌리면서 행진을 했습니다.

봄햇살이 눈부시게 따사로왔습니다. 시민들의 옷차림도 화사한 봄옷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순례단원은 아직까지 늦겨울 잠바를 입고 있습니다. 처음 서울구치소를 출발할 때가 겨울의 끝자락이었으니까 그럴 법도 합니다.

대로변으로 행진을 하니까 시민도 없고, 주목하는 사람도 없고해서 상권밀집지역과 시장통으로 행진코스를 바꿨습니다.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이 신기한 듯이 우리를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좀 싸늘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고 있었는데 대열 맨앞에 있던 단장님과 박용주님이 뒷사람과 자리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한쪽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박용주님과 최진수 단장님이 봄햇볕 때문에 인상을 빡쓰고 걷고 있는 모습을. 그것도 대열 맨 앞에서. 가슴에 두르고 있는 선전물이 아니었으면 아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역시 단장님의 상황판단의 신속감과 과감한 결단력은 탁월하신 것 같습니다. 자리를 바꾸니 한결 나았습니다.

점심은 무심천에서 김밥으로 해결했습니다. 무심천 주변으로 벚꽃이 지천이었습니다. 물은 더러워 보였지만, 그래서 거기서 살건 다 산다고 청주지역 일꾼들이 자랑을 합니다.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잔디위에서 김밥을 먹으려니 소풍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소중씨 작은 동생의 노래를 청해들었습니다. 이어서 문천관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업'된 분위기가 바로 '다운'되었습니다. 헝클어진 분위기를 수습해보려고 문천관님은 3곡을 연이어 불렀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분위기를 수습해준 분들은 민주노동당 청주지부 학생위원회에서 나온 학생들의 율동공연이었습니다.

청주교도소에는 노점상 철거에 맞서 항의하다 '폭력'혐의로 구속 수감된 박정제님이 있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단장님은 모든 교도소에서 그랬듯이 몹시 속상한 모습이었습니다. 박정제님이 수감생활을 하면서 밖에 있는 동지들로부터 어떤 배려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노역활동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교도소 측으로부터 이에 대한 응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몹시 분개하셨습니다. 그 분노와 속상함이 너무 절실하게 다가와서 참가한 사람들 모두가 단장님의 이야기에 공감했습니다.

집회 도중에 범민련 의장님과 범민련 서울시연합 의장님이 지지방문을 와주셨습니다.

문천관님, 박기동님, 박용주님, 그리고 양지웅님이 이탈하는 날입니다. 양지웅님은 원래 어제 가야 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미적미적 하다가 오늘에서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심정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고난의 행진'은 그 출발부터 '의리'로 시작하였고, 행진 과정도 '의리'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난'속에서 맺은 인연 절대로 잊지 맙시다.

행진거리 20Km / 행진인원 30명

고난의 행진 17일째 (4월 7일)

여기는 민족 고려대학교 서창켐퍼스입니다.

지금 밖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고난의 행진'을 떠난 이후 첫 번째 내리는 비니까 농번기 농민들에게는 반가운 손님같은 단비일것입니다.
양심수 가족에게도 봄가뭄의 단비같은 반가운 소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새벽에 유일한 난방기구였던 가스난로가 꺼진 것입니다. 모두들 추위에 어깨 눌려 괴로워하고 있는데 유독 사지가 찢어져라 기지개를 하며 '잘잤다고'고 하는 동지가 있었습니다. 경원대에서 오신 이 동지는 하나밖에 없는 전기장판 위에서 그리고 가장 두꺼운 침낭을 둘둘 말고 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침이 너무 상쾌하다'느니, '어젯밤에는 너무 잘잤다'느니, '어제 먹은 개고기가 좋기는 좋은 것 같다'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사람이라도 편하게 자서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1000리길을 오면서 각 지역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동지들의 따뜻한 배려 때문에 편안히 올수 있었습니다. 동지들의 배려는 대부분 마음과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여건이 되건 되지않건 순례단을 뜨거운 마음으로 맞이해 주었습니다. 청주에서도 그랬습니다. 청주지역 일꾼들은 어제 밤에도 순례단이 펴놓은 천막을 떠나지 않고 밤을 같이 지켜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자신들끼리 부산히 움직이면서 순례단에게 아침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청주지역 일꾼들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민주노동당 청주시 상당지구당 준위비위원회 사무국장님이 순례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온 학생이 순례에 동참하였습니다. 12Km정도를 갔을 때 이정태님이 합류했습니다.

도중에 단장님이 숫가락으로 땅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했더니 길가에 핀 민들래였습니다. 페트병을 반으로 잘라 화분을 만들어서 민들래를 옮겨심었습니다. 민들래는 생명력이 강해서 어디서나 잘 피어나는 꽃입니다. 용도를 뭍자 김소중님에게 줄 선물이라고 합니다. 가끔 단장님의 감수성과 섬세함에 순례단원은 놀랍니다.

순례단의 주가가 날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청주 CBS에서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전화 인터뷰였습니다. 담당 PD가 "쌍욕 빼고 하고싶은 이야기 다 하십시오"라고 했답니다.

인터뷰에서 단장님은 양심수 사면의 가장 큰 걸림돌로 공안사건으로 호구지책을 삼고 있는 보수언론과 공안귀족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인터뷰는 8분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물어보니까 잘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쌍욕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사저널에도 순례단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오후에는 단장님의 제안으로 순례단원 모두가 김소중님의 문병을 갔습니다. 안성까지는 괜찮았는데 서울이 다가올수록 차가 막혔습니다. 대략 5시간만에 일산에 도착했습니다. 8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김소중님이 환하게 웃으며 순례단원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혈색이 너무 좋았습니다. 수술하기 전보다도. 아직 정확한 수술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소중님은 매일 병원 복도를 20바퀴씩 걷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10m도 안되는 거리가 1000리처럼 느껴질 만큼 힘들었지만, 의사들과 간병인도 놀랄 의지력으로 치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합니다. 조만간 의사선생님의 허락을 받아내서 대전을 가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순례단원이 사온 거봉을 먹으면서 순례단원과 즐거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소중님의 언니가 거봉으로 술담가 주겠다고 하자 모두들 웃음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문병을 다녀오면서 또다른 '고난의 행진'이 일산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단 일산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감옥안에서도, 감옥밖에서도 이 지긋지긋한 국가보안법아래 고통받고 있는 모든 양심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고난의 행진'은 전국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이들에게 승리의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행진거리 : 25Km
참가인원 : 6명

고난의 행진 18일째 (4월 8일)

여기는 천안 거재마을입니다.

어제 일산에서 조치원에 도착하니 새벽 3시였습니다. 이것저것 하다보니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모두들 아침 7시 넘어서 기상을 했습니다. 잠이 부족하다보니 오늘은 말도 헛나오고, 어이없는 실수가 많았습니다.

출발 전에 한자리에 모여서 그 지역 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의의 구호로 그 자리를 정리하고 출발합니다. 오늘도 고대 학생회관 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명원님이 구호를 선창했습니다. 명원님의 구호는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국가보안법 철폐하고 양심수를 석방하라!" 구호가 매일 똑같습니다. 이것을 의식해서인지 오늘은 단장님이 두 번째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구호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김소중의 아내 하영옥을 석방하라!" 단장님이 심각한 얼굴로 모처럼 회심의 구호를 외쳤기 때문에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단장님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김소중님이 '방사능'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수술 결과가 좋다는 것입니다. 방사능? 방사선 아닌가요? 누군가가 질문을 하자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로 정정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단장님을 비롯하여 모두들 피곤했습니다. 어제 단장님은 30분동안 풋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피곤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단 걷기 시작하니까 모두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차를 타는 게 걷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장기수 선생님이 그랬답니다. 두 손이 등뒤로 꺽인 상태로 3일동안 징벌방에 갇히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 상태로 있는 것이 더 편했답니다. 걷기를 19일동안 계속하다 보니까 순례단원은 모두는 걷는 게 편해지게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시간당 7Km의 속도로 걸었습니다. 이 정도면 아주 빠른 속도입니다. 예정되었던 귀착지점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서 걷는 도중에 도착지를 천안으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내야 했습니다. 강풍에 맞서 미친 듯이 걸었습니다. 바람 때문에 걷는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도중에 iTV 기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질문은 별 것 아니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는게 그렇게 쉬운게 아닙니다. 솔직히 대답하자면 "아무생각이 않납니다.". 뭔가에 몰입을 하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천안에 도착했습니다. 천안/아산지역 통일연대 상임대표님과 여중생 천안지역 대책위원장님, 안티조선 천안지역 대표님이 순례단을 맞이해 주셨습니다. 보궐선거가 있는 아산지역에서 지구당 개소식이 있는 바람에 많은 분들이 마중 나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오영준님(명지대 총학생회 정보통신국장)과 이창배님(구로청년회회원), 이정은님(김대원 대책위), 노초영(서울대학생)이 고난의 순례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김미라님(성남시의회의원)과 김수병님(한겨레21기자님)이 지지방문을 온다고 합니다.

두지연님에게서 온 썰렁한 문자를 마지막으로 오늘일지를 정리하겠습니다.

"최근 여론을 들끓게 하는 소식 진짜루 따끈한 소식 양심수들이 모두 석방된다는 소식"
(최진수를 가지고 3행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행진거리 : 34Km
행진숫자 : 7명

고난의 행진 19일째(4월 9일)

여기는 천안교도소 앞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교도소 앞에 천막을 쳤습니다.

지금 천막 안의 정경은 몹시 정겹습니다. 천장에는 백열등이 켜져 있고, 밥통안에는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천막 가장자리로 천안지역 노동자 동지들이 가지런히 둘러앉아 있고, 몇몇 동지들은 자리가 부족해서 서있습니다. 봄 날씨치고 기온이 싸늘하지만 모여있는 사람들의 온기와 백열등의 색깔 때문이지 천막안의 공기는 훈훈합니다. 자리에 계신 분들은 민주노총 충북본부 동지들과 세원테크 노동자들, 그리고 중부지역 가스공사 조합원들입니다.

오늘은 걷는 일정보다 집회 일정이 더 많았습니다. 천안까지의 거리는 4Km정도입니다. 12시까지 천안역광장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일정입니다. 천안역에서 이 지역 동지들과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은 선전물을 만들고, 선동문안을 작성하는 것으로 보냈습니다. 집회에는 세원테크 노동자들과 민주노동당 동지들, 통일로가는청년회 회원들이 참석해주셨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천안교도소까지 행진을 했습니다. 행진거리가 8Km정도 되었습니다. 집회가 늦게 끝나서 서둘러 가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면회 시간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걸었습니다. 천안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행진을 했는데 이분들이 순례단의 걸음을 쫓아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안교도소는 경치가 아주 수려합니다. 일단 주변 경관이 유원지와 흡사합니다. 정문앞에는 사슴까지 키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입에는 길을 가로질러 반원모양의 간판이 있습니다. 간판에는 "어서오십시요."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런 간판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안교도소에는 세원테크 노동자 4명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쟁의중에 회사측으로부터 고소 고발되어 구속 수감되어있는 분들입니다. 세원테크 투쟁은 승리했지만, 그 투쟁을 이끌던 지도부 몇몇을 구속시키는 것으로 회사는 투쟁의 불씨를 끄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동지들은 하나같이 밖에 있는 동지들의 안부와 근황을 먼저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면회간 동지들이 말할 틈도 없이 "열심히 싸워달라"는 말과, 순례단원들에 대한 걱정과 지역동지들에게 순례단을 잘 대접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순례단원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이미 감옥안에서부터 특별접견을 요구하며 투쟁하셨다고 합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지지방문을 오시고 순례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박종석님은 거창한 결심을 가지고 참가했다가 싱겁게 돌아가셨습니다. 서울에서 하고 있는 일이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렵답니다. 그래서 큰 각오를 하고 천안까지 내려왔는데 밥만 먹고 가다시피 하셨습니다. 돌아가기전에 인사를 하려고 하니까 단장님이 그냥 조용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김미라님과 김수병님이 찾아왔습니다. 보고싶어서 왔답니다. 정말 그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김수병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고난의 행진 홈페이지을 검색하고 있으며 하루생활의 삼분의일을 순례단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순례단의 근황에 대해서 대부분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이 일년에 단 한번밖에 없는 날이라고 하면서 고생하는 순례단을 위해서 한턱내셨습니다.

한용진님과 황정주님이 오셨습니다. 13일에 있는 대전교도소 문화제 준비현황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그닥 반가운 소식은 없었습니다. 대화 도중에 문예판에서 반주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태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반주(飯酒)는 내가 준비할 수 있는데......"

순간 훈훈했던 천막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습니다. '남들은 발에 물집이 생기는데 정태님은 혀에 물집이 생기고 있다'는 악성 루머가 순례단에게 전해진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지자 용진님은 정태님에게 물집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밤늦게 i-TV 시대공감 프로듀서가 순례단원으로 합류하셨습니다. 새벽에 서울대학교 학생 김종현님도 순례단에 합류하셨습니다

고난의 행진 20일째 (4월 10일)

여기는 천안군 대평리 마을회관입니다.

천안군 농민회의 지원으로 오늘은 마을회관에 짐을 풀게 되었습니다. 농번기라서 모두들 바쁜시기입니다. 한창 논에 로타리치고 못자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입니다. 처음 우리를 맞이해 주셨던 이장님은 나이가 50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자신이 이 마을에서 막내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농촌에 젊은 일손들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저녁이 되니까 천안지역 농민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일꾼들이 지지방문을 와주셨습니다. 순례단의 취지와 여정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는데 단장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정에 없었고, 농번기라 바쁜 시기이지만 ‘이 사안은 절대로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13일 대전교도소앞 문화재에 최대한 참가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주셨습니다. 총무부장님께서는 같이 걷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 하시면서 표고버섯 한바구니와 오늘 갓 도정한 20kg쌀을 순례단에 주고 가셨습니다. 정말 계산 없는 순박한 농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행진거리는 짧았습니다. 24Km정도의 거리입니다.

천안교도소에서 출발하여 천안시내를 가로질러서 대평리까지 가는 코스입니다. 이틀전에 이미 왔던 길이었기 때문에 다소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짧은 거리라서 부담은 없었습니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 대로변에 도착하니 8차선 도로 중앙선에서 호두과자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에 단장님이 그 아주머니로부터 호두과자를 샀습니다. 모두들 길을 건넜는데 단장님이 중앙선에서 아주머니와 만원짜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시는 겁니다. 빨간불이 켜져서야 길을 건너오신 단장님에게 영문을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그냥 가라고 하는 것을 한사코 계산하려다가 늦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주머니가 1000원 싸게 파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20일동안 걸으면서 순례단원들은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 지니고 있던 종잣돈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모두 유명무명의 지인들과 동지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수원에서 갓 딴 사과꾸러미에서부터 몇십만원에 이르는 거금까지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양심수들을 생각하며 도움을 주신 분들을 순례단원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행진 과정에서 좀 황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정대교를 건너고 있을 때였습니다. 2/3가량 지나오는데 갑자기 다리가 아래위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현기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분명 다리가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진동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때 뒤에서 걷고 계시던 단장님이 혼잣말로 ‘지진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 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해왔습니다. 하도 사건사고가 많은 나라에서 살다 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맨앞에서 걷고 있던 명원님이 단장님을 향해 다시 한번 확인질문을 하였습니다.

“지금 이 다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 맞죠?”
“음........맞는 것 같다. 아무래도 지진인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그 순간 아마 이 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상황인식에 일치를 한 것 같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명원님이 단장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럼, 뛸까요?”
“그래, 뛰자!”

그때부터 순례단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숙소에 도착해서 마침 소정대교를 건너고 있을때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단장님이 지진이 나는 것 같아서 뛰었다고 이야기 하자, 나머지 순례단원들은 방바닥을 치며 웃었습니다. 성일님은 맨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순례단이 뜀박질을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오늘 처음 결합한 iTV 피디님들은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원래 이렇게 걷다가 뛰기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앞에서 뛰길래 덩달아 같이 뛰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건축계통을 전공했던 이정은님에 의해서 해명되었습니다. 원래 다리는 신축성이 있어서 그 정도의 흔들림은 다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원님은 아직까지 분명히 지진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생각나는 날이었습니다. 어제 지지방문을 오셨던 분들도 생각이 많이 났고, 특히 며칠동안 순례단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동행취재하였던 i-TV 임건영 피디님과 이병숙 피디님의 빈자리가 많이 느껴졌습니다. 항상 순례단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촬영을 하셔서 카메라를 의식하게 하였고, 가끔 ‘지금 무슨생각 하십니까?’라는 어려운 질문으로 그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셨기 때문에 빈자리가 더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후유증이 없는지 걱정됩니다.

밤에는 내일 공주대까지의 길안내를 해주기 위해서 학생 한분이 결합하였습니다. 그리고 멀리 광주에서도 순례에 참가하기 위해서 내일 아침에 온다고 합니다. 공주농민회에서는 내일 점심밥을 지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행진거리 : 26Km
참가인원 : 6명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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