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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8일 전남 목포에서 일어난 ‘4·8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4일부터 6일까지 목포시내와 유달산 일대에서 열린다.
목포시와 보훈청 목포지청이 주최하고 목포 정명여중고 총동창회, 목포문화원 등이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4일 정명여중고와 시내 일원에서 4·8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다.이어 달성공원 주차장에서 ‘4·8 만세 조선민중들이여 영원하라!’라는 재현 마당극이 펼쳐진다.
4·8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에 자극받은 목포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 양동교회 신자들이 그해 4월 8일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 사건이다.
교회 앞마당에는 민주화 운동의 산실인 표시석이 있다. 5·18 광주 민중항쟁을 정점으로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를 갈구하는 목회자들이 투쟁운동을 위한 회의를 자주 열었다.
양동교회 옆 정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는 선교사 사택과 양관을 볼 수 있다. 또 독립운동 기념비와 이 학교 출신 문인 박화성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정명여중·고교는 1903년 설립한 목포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이다. 1982년 선교사 양관을 수리하던 중 천장에서 3·1운동 당시 광주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도쿄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조선독립 광주신문’‘독립가’ 등의 유인물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25일 ▲목포 정명여중 구 선교사사택을 문화재 등록예고 대상으로 지정했다.
본교는 100여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이 고장의 여성 교육을 선도하고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오늘도 1,000여명의 학생들과 60여명의 교직원들은 빛나는 전통을 이어가고 밝은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모두가 하나되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올바른 민주 여성을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목 : 느티나무
교화 : 동 백 꽃
1895년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각축이 일어나자 이에 정부는 자주독립 국가의 면모를 위해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는 등 자주성 회복을 하고있었지만 미국은 이러한 세력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중립 정책을 고수하여 이것이 결국 고종의 신뢰를 얻어 선교사들은 왕실과 깊은 유대를 맺으며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한국에 빨리 뿌리내리게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귀국하여 윤치호 등과 함께 민족의 자주 독립을 목표한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그 목적 실현에 있어서는 동학란과 같은 혁명적 방법을 거부하고 도덕적 설득을 통한 정치 사회개혁을 표방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민족 교육과 의식에 눈띄기 시작하여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백성들을 사로잡아가기 시작했으며 이렇듯 국내외 분위기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변모되어가자 교회의 선교는 활기를 띄게 되었고 특히 미 남장로교 선교 본부로부터 선교사들의 증원부대가 파견되어 호남 선교의 발판이 되기 시작 했다
대략 학교 홈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서 정명여학교의 변천사는 역사 책의 한 페이지를 외워야 할 정도로 복잡하고 중요하다.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선교사 사택에서 숨박꼭질 하곤 했던 철부지 여중생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 때가 얼마나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입술이 깨물어진다.
친구들과 함께 팔걸이를 하고 웃고 있는 사진과 단체 사진의 단골 배경이 된 뒷 풍경은 거의가 선교사 사택주변이지만그 시절엔 교감 선생님 관사로 사용되었다.
교감 선생님 보단 교감 선생님 아들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킬킬 거리던 사춘기 때였다.
여학생이 바글 바글 끓는 여. 중고 캠퍼스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나타나면 소리를 질렀을텐데, 그 남학생은 무지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여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귀 밑까지 빨개진 얼굴로 우리 앞을 지나던 또래의 잘 생겼던 남학생의 교복과 교모와 단정한 걸음걸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마 내가 가장 심하게 소리를 치면서 방방 뛰었을 거라고 친구들은 분명히 말할 것이다.
느티나무가 포근하게 자리잡은 동산에 앉아 친구들과 비밀 이야기도 나누고 혼자만의 한숨도 흘러 보냈는데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 당시 만큼의 멋진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여름이면 녹색정원이 되었고 겨울이면 스위스의 별장이 옮겨온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팔을 돌려 안아도 남던 느티나무 고목과 아름드리 덩쿨들 네잎 클로버들의 천국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하나 둘 씩 짝을 지어 치마에 풀물이 들도록 비비댔다.
돌로 된 건축물들은 이래 저래 걱정 근심도 많던 사춘기 시절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도서관이 자리하고 고등학교 예절관 같은 건물에선 가정 솜씨물들을 진열하고 전시하기도 했다. 언니가 도와준 갈래머리 소녀가 예쁜 자주색 방석이 메인에 놓여 있을때의 환희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쉬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 친구들을 끌고 가서 보여주던 내가 그리고 별 저항없이 나의 자잘한 것들을 순응하며 감싸준 다사롭던 친구들이 그립다.
미션 스쿨이었으니 종교 과목도 시험을 치루어야 했고 월요일 아침인가 수요일 아침에는 "경건회" 라는 전체 예배 시간을 갖었다.
전교생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강당에 모여서 헤어진 다른 반 친구들과 쪽지를 나누거나 킥킥 대며 눈감고 기도하는 대신 앞에 앉은 친구들 교복에 낙서하는 장난으로 보내곤 하던 불량기도 다소 있었던 때였다.
교실로 이어지던 계단에 쏟아지던 왁자지껄한 소리들은 박제가 되었을까?
여고언니들의 반 나체 차림에 관심이 많아서 발레를 구경하느라 수업종이 치는 줄도 모르고 들여보다가 출석부로 엉덩이를 맞기도 하던 순수하기 그지 없던 친구들은 어디에서들 잘 살아가겠지.
한 겨울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일제히 창밖으로 두눈은 달려가 우와.. 한 두 마디 감탄이 쏟아지고 내내 눈길을 거두지 못한 몇몇의 아이들은 사진 찍으러 나가자고 애교를 부리곤 했다.
첨엔 못 들은척 하시던 선생님도 이구동성으로 손바닥 함성을 쳐대면 도덕 선생님이셨던 담임은 속아 넘어가시는 척
"그래 그러자!"
하시며 문을 열어 주셨다.
함박눈이 발목을 덮을 만큼이면 사진 찍는 것은 둘째고 눈싸움과 뒹굴기 하던 기억도 이젠 바랜 사진첩에서나 만나는 과거가 되었다.
때로는 그 시절이 눈물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작년 스승의날 즈음하여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중학교 3년 내내 나의 담임이셨던 정선식 선생님은 학교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해리포터의 교장선생님처럼 인자한 얼굴로 나타나셨다. 모교의 교장선생님이 되신 거였다. 당황함과 반가움에 펑펑펑 울면서 메일을 보냈더니 바로 답장을 보내주셨다.
내년에 100주년 기념 행사를 하니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언질을 주셨는데 어느새 1년을 담쟁이 넝쿨처럼 넘기고 말았다.
내가 답장할 차례인데 아직 미루고만 있다. 삼년 내내 한 담임이셨던 것이 못내 싫기도 하고 나의 못난 점까지 아신다는 생각에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정선식 선생님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사사건건 구설수에 오르며 내내 시달려야 했던 미남이셨다.
"악식이 온다." 하면 선식이란 이름을 악식으로 바꿔 부르면서 성선설 성악설 수업 시간이면 함박웃음을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열세살 소녀들은 어떻게들 변했을까?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주신 거에 비하면 난 은혜를 모르는 제자임에 틀림없다.
자취하는 집으로 가정방문 오셨을때 어찌나 황당했는지 선생님은 모를것이다.
다음날 부끄럼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데 조회 시간에
" 맛있는 것 하면 영아에게 가져다 줘라, 자취하는데 얼마나 집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는지 놀랬다."
동태찌개를 하거들랑 식기전에 냄비째 들고 가라."
그땐 그런 노골적인 표현들이 싫기만 했는데 지금 돌이키니 선생님의 자상함이었다는 고마움에 목이 메인다.
미남 선생님의 눈길을 손길을 애태우며 학교를 오고 갔던 그 마음 한 자락을 꽁꽁 묶어 낼 모레 스승의 날엔 엄청난 정명여중 교장실로 보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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