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천에 아가씨 향기 같이 달콤한 아카시아 꽃 향기가 그야말로 초절정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 뒷산에서도, 늦은 밤 택시를 타고 달렸던 중량천의 가로수 길에서도 주렁주렁 꽃을 피운 아카시아가 꿀벌만이 아니라 내 마음까지 빨아들인다. 잠시 아찔해지면서 몽롱한 꿈결같이 느껴지는 향기다.
봄날도 저물고 입하를 지난 지금 느지막이 꽃을 피운 아카시아 나무는 어느 남쪽나라에서 홀씨를 날려보낸 외래종이었던가. 언젠가 아카시아가 우리 산천의 토속 나무들을 몰아내는 천이 과정을 밟는다며 솎아 내야할 미운 나무로 지적되더니 또 언제는 좋은 목재로서 각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경학과를 전공한 선배는 아카시아의 왕성한 번식력도 걱정할 것은 못된다고 했다. 자연은 그 환경에 맞는 수종들(참나무)이 점점 우위를 점하는 자연스런 천이 단계를 밟는다고 하니 말이다. 인간이 해코지만 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성숙해져 생태적으로 안정된 숲으로 변모해간다는 얘기를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곧 여름이 닥치면 그 짧은 순간의 황홀함도 잠시, 떠나야할 때를 알고 아름답게 떠나야하는 법. 정신마저 정화되는 이 천연 아로마 요법을 받으며 홀로 학교 노천극장에 앉아 향기에 취해 저녁놀을 바라보던 서늘한 저녁. 나는 사랑이라 했지만 자신에게는 그냥 바람일 뿐이라고 한 그녀가 생각났고 영화 '봄날은 간다'가 함께 떠올랐다.
사랑이라 했지만 바람이라 하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는 영화장면처럼 유지태의 가슴에 벚꽃으로 피었다가 갈대 숲의 바람으로 남았다. 격한 감정도 저물고 갈대 숲의 바람소리로 순화된 젊은 날의 짧은 사랑이리라.
사랑의 감정이 그리 길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은수(이영애 역)는 결혼에 한 번 실패한 여자다. 상우를 알면서 젊은 남자의 뜨거운 사랑이 그립고 욕망스럽지만(?) 그 결말을 익히 예견했다. 속된 표현으로 즐기고는 싶지만 또 다른 질퍽한 인연의 시작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적당한 선을 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순수한 영혼의 상우(유지태 역)는, 사랑이란 쉽게 변치 않을 것이라 믿는 우리의 젊은 베르테르다. 농염한 한 여인의 품속, 그 따뜻함을 언제고 가슴에 묻어두려 했지만, 그래서 아기자기한 사랑을 꿈꿨지만 그럴수록 차가워지는 그녀를 보며 가슴 아파해야 했다. 자신이 만들고싶은 인연의 사슬이 엉키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가는 그녀의 냉정함에 떠나야 함을 직감한 상우는 힘든 질투와 이별의 시간을 감내한다.
세상의 눈길을 잘 아는 여자와 순수한 사랑을 믿는 젊은 남자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난다.
낭만의 도시 강릉과 춘천이 나오고 자연의 소리를 담아내는 예쁜 장면들이 가득한 <봄날은 간다>는 아름답게 보면 남녀간의 야릇한 감정 변화와 낙화같은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은 참으로 노골적인 영화다.
벚꽃 만발한 거리에서 상우는 다시 '같이 있자'는 은수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먼저 이별을 말하고 돌아선다. 그러나 은수는 마지막 자존심을 잃지 않는다. 다시 상우를 불러 세워서 악수를 청하고 우두커니 서있는 상우를 뒤로하고 발길을 돌린다. 자신이 먼저 이별을 고했던 그 전처럼.
갈대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소리 같은 사랑만 남았으면
상우의 할머니는 첩까지 두며 살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평생 기다렸다. 어느 화창한 봄날 분홍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집을 나가 그리움 찬 세상을 떠났다. 여자는 언제나 봄날을 기대한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그날까지 봄날을 잊지 못한 것이다.
은수의 봄날도 그렇게 갔다. 다시 상우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상처입고 한층 성숙해진 상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안 그녀, 은수의 봄날도 그날로 갔다.
또 어떤 사랑을 시작할 지 모르지만 은수의 화려한 봄날은 저물었다. 상우는 그렇게 사랑을 알게됐으리라. 은수는 젊음과 봄날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것을. 역시 은수에게 문득 떠오르는 상우의 흔적은 화사한 봄을 생각나게 만드는 사진 한 장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어수룩하리 만치 순수한 상우에게 감히 누가 돌을 던지랴. 첫사랑 같은 마음으로 사랑에 흠뻑 젖은 상우가 짧은 시간 열병을 앓았을 뿐 그가 젊음을 탕진했다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그렇게 호된 사랑으로 여자와 인생을 알아 갔을 것이므로.
할머니의 명언이 예쁘게 포장된 영화의 모든 것을 풀어헤친다. '떠나버린 버스와 여자는 잡지 않는 법이다'.
뻔한(?) 스토리를 저물녘의 서늘한 바람처럼 다가오게 한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미장센과 감정 연출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리고 이젠 나의 기억도 마지막 장면의 상우의 마음처럼 바람에 하늘거리는 갈대 숲 같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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