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본 일기장

검토 완료

김영(miso00)등록 2003.06.03 20:05
5월 19일 월요일 날씨: 해님 쨍쨍
제목: 평범하고 조용한 범생이

요즘에 내가 결심한 것이 있다.
그리고 이 결심은 굳히지 않고 평생 지켜나갈 것이다. 그건 바로 평범하고 조용한 범생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앞머리도 안 내리고(깻잎머리) 옷차림도 어른 같지 않게 단정히 입으려고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걸음걸이도 성격도 고쳤다. 예전에 나빴던 나의 모습을 모두 다 지워버리고 이제 6월부터 새로운 ‘나’의 모습으로 변신~할 것이다.
모든 과목을 열심히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다른 어른들이 봤을 때 “아! 저 아이는 공부도 잘하게 생겼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질도 죽이고 옷차림과 머리도 단정히 공부도 항상 열심히 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 5월은 노력하는 시기이고 6월 달부터 본격적이 시작이다. 야호~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나누어준 '꿈을 엮어가는 일기장' 한 바닥을 특수문자와 섞어 꼼꼼히 채운 5월 한 날의 일기이다.

아이 일기를 보지 않은 지는 아주 오래 전이다. 2학년이 되기가 무섭게 자아라는 개념이 꿈틀거리는지 아이는 일기를 '검열'하는 것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며 단호하게 내용은 보면 안 된다는 약속을 받아내곤 했다.

일기 내용도 중요하지만 꾸준히 써야 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었던지라 약속을 잘 지켜 주었다.

그런데 지난번 대대적인 일기검사 사건 이후로 이젠 지나가는 말이 아닌 구체적인 잔소리를 하게 되었고 아이는 아이대로 신경질을 부리면서 내용은 절대 보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일기장을 들이밀고는 달아나는 요즘이다.

학기 초 담임선생님 배정을 받고 난 후에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일기검사를 하지 않는 남자 선생님이라는 데 있었다. 주임선생님이시니 나이도 꽤 들었고 과도한 학사업무에 늘 바쁜 분이시며 작년에도 일기 검사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이어서 아이들에겐 참 좋은 선생님, 엄마들에겐 걱정스런 분이셨다. 아이들은 일기쓰기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 일기검사 지도마저 없으면 스스로 원해서 쓰기는 그리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

4월초에 열린 학습이 있어서 학교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수업 후에 참관 소감문을 적고 담임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6학년이니 준비물을 알아서 챙기지만 속 시원하게 알림장을 써주시라는 건의가 나오고 숙제도 내 주셨으면 하는 의견도 나왔다. 일기지도를 아니 검사를 꼭 해주셨으면 한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내 놓았더니 선생님은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일기 썼니?”으레 하는 밤 인사로 남기면서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엄마 일기 27개 써야 해 ”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3월부터 일주일에 3개씩 계산해서 적어도 27개는 써야 해”하더니 소설 창작이라도 하듯 하루에 4-5개를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3일 정도 기한을 주신 듯했고 아이는 “ 우리 언제 영화 봤지, 이모 집에는 언제 갔지, 외식한 날이 며칠이야?”지난 기억을 더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건 일기가 아니라 완전히 글짓기였다.

3-4일을 거의 일기쓰기에 심취해 무사통과한 아이는 몇 명의 친구들은 아예 매맞기를 작정하고 왔으며 선생님은 공평하게 27개에서 빠지는 숫자만큼 회초리를 드셨다고 자기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 후론 잘 되었다 싶어" 며칠까지 썼느냐, 밀리지는 않았느냐?" 주절주절 싫은 간섭을 하기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어제도 컴퓨터에서 버디를 날리느라 정신없는 아이를 불러 세우고 일기장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어련히 알아서 할 까봐!" 볼멘소리를 하더니 화장대 앞에서 겨우 30분 정도 적더니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장든 아이에겐 미안했지만 날짜를 따져 볼 요량으로 펼쳤다가 제목이 그럴싸해서 본의 아니게 들여다 본 일기의 내용을 보니 자식은 믿는 만큼 자란다는 평범하지만 무지 어려운 교훈을 느끼게 한다.

늘상 매사에 훌륭하고 민주적인 엄마라고 자부하던 내게 지인들에게서 듣는 딸아이의 복장에 대한 염려는 두고두고 얄팍한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다.

키가 큰 편에 속하는 딸아이는 성숙이 빠른 편이다. 학창시절 늘 앞자리를 면치 못했던 나와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지내는 것 같다.

이모들의 옷을 챙겨다 입으면서 어른 흉내를 맘껏 부리고 일명 깻잎머리라고 하는 이마 애교머리를 살짝 내린 헤어스타일은 일명 노는 아이들이 전유하는 논다니과라고 하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나는 무척 화를 냈고 그 멋에 길들여진 아이는 내 눈을 교묘하게 피해 가끔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외모에 신경을 쓸 때이고 다소 반항심도 강해지는 사춘기인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했는데 계속되는 집중공략 때문인지 스스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모양이다.

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보는 듯해 감사한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스스로를 채근하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나 범생이처럼 행동하기로 했어. 옷도 머리도 그런데 친구들이 엄마처럼 입으면 범생이가 된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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