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 희생자도 잊지말아야

교전후 수도병원에서 처참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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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kjy43)등록 2003.06.19 17:51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우리는 월드컵 3, 4위 전 터키와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 대형 터키 국기까지 등장한 축제 분위기에서 독일전의 패배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TV에서는 연평도 앞 바다에서 양측 해군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점심시간이 되면서 TV뉴스를 통해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어쩐지 지금까지 16강, 8강 전을 녹화 중계하던 북한의 행동 속에 이런 음모가 숨겨져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역시나 하는 마음에 이런 놈들을 위해서 우리가 민족운운하며 대화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고있는 것인가? 다음은 서해교전 직후에 긴박하고 처절했던 수도병원의 상황이 인터넷을 통해 올라왔다. 당시 수도병원에 근무하던 한 군의관이 적은 글이라고 한다.

내과 군의관이었던 나는 서해교전 다음날인 일요일 긴급호출을 받고 출근하면서 들어선 중환자실의 분주함은 수도병원 근무 후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중상자들이 즐비했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들도 눈에 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난리인가. 저 창창한 청춘들을 어찌 하라고…. 화재에 의한 흡인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들을 봐주고 담당배정을 한 후 내 환자인 오중사의 몸에 박혀 미처 제거되지 않은 파편과 총알 조각들을 손 닿는 대로 마저 빼냈다. 14mm 기관총 탄두가 깨진 채로 등뒤를 뚫고 들어가 방광을 찢고 사타구니 근처의 피부 밑에 묻혀 있었다. 피부를 절개하고 탄두를 끄집어내니 반 동강이 난 것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 튀어 들어간 듯 했다. 그나마 경상 축에 속하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사뭇 처절했다.
오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 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 창이 즐비했다.
“재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 중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 오른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 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 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 하는 의무병은 전투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 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시부터의 충격에 의한 급성 신부전 때문에 신장내과 동료도 힘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광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 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동료 군의관들이 실은 대단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 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 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함에 박 상병의 회생은 한 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워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 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 손실이 감정적 아쉬움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픈 마음과 괜스러운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버렸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 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 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 역시 박 상병의 망가진 육체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 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사이 오 중사는 방광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겨지고, 부정장 이 중위도 정형외과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박 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 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 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 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박 병장(진급했다)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무공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 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 중위는 의족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였고, 퇴원 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찡한 회한과 감동이 인다. 그들은 그렇게 조국을 위해 숨져갔고 지금도 고통 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들을 기억이나 하는가? 지난 주에 1년 전 장갑차 사고로 사망한 효순이와 미선이 추모 1주기 행사를 반미시위와 결부시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물론 많은 네티즌과 국민들의 우려 속에서 10만 집회는 3만 여명으로 축소되고 평화적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이시기에 우리 네티즌들의 목소리는 서해교전을 상기하자고 외쳤다. 여중생 범대위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보아도 미군 훈련 중 발생한 우발사고를 악용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범대위를 이적단체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이제 다음 주 6. 29일이면 서해교전도 1주기를 맞이한다. 범대위라는 조직적 행동단체가 없으니 대규모로 추모행사가 계획되지 못하더라도 국민적으로 상기하는 행사는 있어야하지 않을까 한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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