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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으로 후퇴하는 교육을 바로 잡자
-------------(초등 교과서 오류 지적--21회)
2001년부터 7차 교육 과정으로 교과서가 바뀌어 2년차 교육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7차에 걸쳐 교육 과정이 바뀐 것은 그만큼 시대의 빠른 변화에 대처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그런데 7차 교육 과정으로 바뀐 초등 교과서를 보면 50년 전으로 역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초등 교과서 읽기 4학년 1학기 98쪽의 <삼년고개>라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 45년 전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배운 기억이 납니다. 그동안 세상은 참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대처하기 벅찰 정도로 현란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로 갈수록 국가 경쟁력 마저 치열한 상황인데 우리의 교육은 언제까지 50 여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한결같아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먼저 4학년 1학기에 실린 `삼년고개`의 내용을 봅시다.)
옛날, 어느 마을에 삼년고개가 있었습니다. 이 고개에서 넘어진 사람은 삼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전설 때문에 삼년고개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삼년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넘어질까 봐 조심조심 걷고 있는 할아버지 앞으로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갔습니다. 놀란 할아버지는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네. 나 죽었어!"
할아버지는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한참 동안 울던 할아버지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할멈, 나는 이제 삼 년밖에 못 살아. 삼년고개에서 넘어졌단 말이오. 하필 거기에서 넘어질 게 뭐람."
할아버지는 걱정을 하다가 그만 병이 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옆집 소년이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참, 할아버지도 뭘 그리 걱정하세요? 어서 일어나셔서 삼년고개로 가시지요."
"거기는 왜?"
"거기 가서 또 넘어지세요."
"뭐라고, 또 넘어지라고? 나더러 아예 죽으라는 거냐?"
할아버지는 화를 벌컥 내었습니다.
"할아버지, 한 번 넘어지면 삼 년은 사시니까, 두 번 넘어지면 육 년, 세 번 넘어지면 구 년은 사실 게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소년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 그렇겠구나! 당장 가서 넘어져야겠다."
할아버지는 고개 위에서 아예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시간이 흘러 삼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삼년고개를 넘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허허, 이제 쉰 번 넘어졌으니 앞으로 백 오십 년은 더 살겠군!"
삼년고개에서 데굴데굴 구른 덕분이었는지 할아버지는 정말 오래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50년 전쯤의 그때는 할머니의 입담으로 들려주는 동화가 참 구수했던 시대입니다. 텔레비전은 나오지도 않았고 라디오도 귀했습니다. 책이나 잡지도 아무나 볼 수 있지 않을 때라 교과서의 이런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오래 살기 위해 할아버지가 계속 데굴데굴 구른다는 삼천갑자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터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이런 옛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의 의의가 있는지 검토해 보았으면 합니다.
교육상의 읽기는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시대에 맞아야 할 것입니다.
시대를 뒤따라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20년, 30년 후를 대비하는 것이 교육임을 분명히 직시한다면 앞서가야 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동화는 너무나 구태의연한 편입니다. 아니 시대 변화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지금은 참교육을 외치는 교사가 전교조-즉 노동자임을 스스로 천명하고 조합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서는 교실을 박차겠다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여 우리끼리 오순도순 사는 세상이 아니라 무한 경쟁의 경제논리가 인간의 어떤 가치나 삶보다 우선시되는 시대입니다. 갈수록 첨예화되는 시대변화에 대처하는 지혜는 교육밖에 없습니다.
초등 4학년이면 어느 정도 쌓은 지적 수준으로 정보도 취합하여 과학 실력까지 발휘할 때입니다.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교육은 4학년의 우리 아이들에겐 너무 수준이 낮은 내용입니다.
옛날 교육에서는 고학년에서 배우던 <오성과 한음>이 3학년으로 자리를 앞당긴 것이나, 일반인이 읽던 문학작품의 출발로 고등학생이 배우다 중학생이 배우다 이제 초등 5학에게 배우도록 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예만 보아도 요즘 아이들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수준에 비교한다면 이 내용은 1학년에게 구연 동화로 들려주어도 아마 시시하다고 여길 이야기인데 4학년에게 배우도록 하여 교과서에 실린 것은 수긍이 가질 않습니다.
교육은 지적 정신적 수준을 높이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기 싫어한다고 그림이 많거나 쉬운 책만 읽도록 하면 점점 더 어려운 책을 못 읽게 됩니다.
우선은 책을 벗삼게 하는 것 같지만 하향으로 수준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삼년고개>를 4학년에게 배우도록 하는 것은 그런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다음으로 교육은 진실을 가르치는 것인데 이 내용은 거짓을 사실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삼년고개' 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글 첫머리의 두 번째 문장에 <전설 때문에>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문장에서는 <'삼년고개' 에서 데굴데굴 구른 덕분이었는지 할아버지는 정말 오래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로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삼년고개는 전설 같은 옛날 이야기일 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진실한 교육이 아닙니다.
<살았다고 합니다.>를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로 고쳐야 될 것입니다.
제가 이 내용을 통해 생각한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니면 말고>의 황당한 모습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고질 중에 지독한 병폐가 있다면 <아니면 말고>도 단연 으뜸일 것 같습니다. 말에 가장 권위 있어야할 국회의원들이 무책임한 말을 하고 여론이 비등하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웃어넘기는 것 말입니다. 그들이 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와 비슷한 연배의 그들이 <국민학교> 시절 삼년고개 같은 엉터리 교육을 받은 결과가 나타난 것은 아닌가, 아니면 말고 식의 교과서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사회인이 될 우리의 장래 모습은 참으로 암담하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르침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바로 발상의 전환이나 고정관념의 타파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한다면 말입니다. 사회나 개인이나 고착된 상식이나 고정관념이 존재합니다. 이에 묶여있으면 우물안 개구리의 안목으로 발전을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창의적 사고력을 깨우치는 교육이 목적이라면 그런 핵심적 가르침의 장치가 있어야 하는 데 미흡함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장수와 건강을 소재로 한 이야기지만 의미를 잘 살린다면 가까운 곳도 자동차를 이용하고, 2층도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는 현대인에게는 정말로 각성을 주어야 할 내용입니다.
승용차를 타고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고 오는 현대인의 모습은 참 아이러니 합니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런 현상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합리한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내용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려서부터 문명의 이기에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고 건강한 정신과 튼튼한 체력을 길러주는 교육으로 다뤄질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건강에 대한 문제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반드시 교과서에서 다뤄졌으면 합니다. 특히 초등 교과서는 20, 30년 후의 세상을 살아 갈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입니다. 50년 전과 하나도 변함 없는 구태의연한 교육이 하루 빨리 세계화를 주도할 수 있는 선진 교육으로 바로잡아지기를 간절히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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