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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오류지적 22>
--------------------교육 심리학이 실종되면
콜라 회사의 광고는 시원한 폭포수나 상쾌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이런 광고를 보고 있으면 시원함이나 상쾌함을 느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영상 선전을 보면 오히려 갈증을 느끼게되고 콜라를 사서 마시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교묘하게 소비자의 심리에 파고든 광고의 전략 때문입니다.
콜라회사의 시원한 폭포수를 보여주는 화면이라도 1초를 보여주는 24장의 필름 속에는 타는 불길이나 끓어오르는 사막의 사진이 한 두 장 꼭 끼워져 있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1초의 24분의 1이나 2로 지나가 우리의 이성으로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두뇌는 그것을 포착하여 기억하는 이치를 선전 효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뺑소니 운전 같은 범인 체포에서 최면으로 목격자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두뇌는 보는 것보다 4배나 빠른 속도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런 점은 교실의 수업풍경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라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손으로는 무엇을 만지작거리며, 옆 친구의 움직임이나 창 밖의 소리나 냄새까지 감지하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어 읽기 4학년 2학기 40쪽에는 '금덩이보다 소중한 것' 이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얼핏 지나치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찬찬히 주의를 기울이리면 재고해보아야 할 사항이 분명 있습니다.
교육은 지식으로 거죽만을 씌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살찌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식으로는 완전할 수 없지만 지혜로 발휘될 때 비로소 온전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교육에 분명 심리학이 있으며 심리학이 도외시된 교육은 완전한 교육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면이 아이들의 뇌리에 스쳤을 때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칫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럼 교과서 내용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금덩이보다 소중한 것
한 젊은이가 오랫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품삯으로 금덩이를 받았다. 고향으로 가던 길에 주막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주막을 나선 젊은이는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보니 주막 주인이 뛰어오고 있었다.
"당신이 금덩이를 두고 갔기에 이렇게 쫓아왔소."
젊은이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조금 가다가 강가에 다다르니, 장마로 잔뜩 불어난 강물에 한 아이가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구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젊은이는 품속의 금덩이를 꺼내 높이 쳐들고 외쳤다.
"저 아이를 구한 사람에게 이 금덩이를 드리겠소."
그러자 한 사람이 옷을 벗어 부치며 나서더니 강물에 첨벙 뛰어들어 마침내 아이를 구하였다. 젊은이는 약속대로 금덩이를 그 사람에게 주었다.
이 때,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왔다. 바로 주막 주인이었다.
"정말 고맙소. 내 아들이 구하려고 귀한 금덩이를 남에게 주다니……."
주막 주인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맙다고 하자, 젊은이가 말하였다.
"아무리 금덩이가 귀한들 사람 목숨에 비하겠습니까? 주막에 금덩이를 떨어뜨리고 나왔을 때부터 그것은 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으로 아이를 구했으니 저는 오히려 좋은 일을 한 셈이지요. 그리고 당신도 정직한
마음씨에 대한 보답을 받은 셈이니 좋지 않습니까?"
분명 가르침을 주는 내용이지만 가르침보다 더 중요한 점을 간과한 졸속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젊은이가 오랫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품삯으로 금덩이를 받았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하룻밤 묵은 주막에다 '오랫동안 열심히' 일한 것을 놓고 갑니다. 이것은 곧 불찰을 뜻합니다. 예사로운 불찰이 아닙니다. 금덩이를 놓고 갈 수 있다는 불찰을 우리 아이들의 뇌리에 남겨둘 수 있다는 것은 교육상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가 강가에 다다르니 장마로 불어난 물에 아이가 빠져 허우적입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가 아닌 장마로 불어난 물에 아이가 빠져 허우적이는 것도 아이들이나 보호자인 어른의 불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마였다면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그에 대한 적절한 주의가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이는 아이를 구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의 몰인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품속의 금덩이를 꺼내 높이 쳐들고' '저 아이를 구한 사람에게 이 금덩이를 드리겠소' 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옷을 벗어 부치고 나서더니 강물에 첨벙 뛰어들어' 아이를 구했습니다.
<이 금덩이를 드리겠소. 그러자 한 사람이 > 중에서 그러자 라는 말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기에서 생명을 구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대가나 보상을 줘야만 가능하다는 비정함을 외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물신 숭배의 경향으로 기우는 풍조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도 교육의 몫일 겁니다.
우리 아이들의 심리 속에 불찰을 예사롭게 여길 수 있는 영상을 남겨줘도 안되며,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모든 사람이 몰인정할 수도 있다는 영상을 뇌리에 심어주어도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금덩이를 보아야만 인명을 구하는 생명경시의 영상을 뇌리에 남겨두게 된다면 절대로 바람직한 교육일 수 없습니다.
자기만의 잣대로 판단하면 공정한 판단이 어렵습니다. 자기만의 시야로 세상을 보면 보이는 것만 보게 됩니다. 판단을 바르게 하고 시야를 넓게 갖기 위하여 우리는 교육을 합니다. 그러니까 교육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는 눈을 뜨도록 합니다. 이렇게 배운 힘으로 넓은 세상을 보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타난 것을 통해 헤아려야 합니다.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만 배우게 하는 교육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가르쳐주는 것만 배우는 바보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은 그런 식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고, 똑같은 내용을 학원에서 다시 배웁니다. 그래도 점수가 적게 나오면 재수해서 또 배웁니다.
이런 교육을 가지고 가르친 것을 누가 더 붕어빵 구워내듯이 정확하게 배웠나를 시험으로 점수화 하고 있습니다. 그 점수로 대학 입학이 결정되고 대학 졸업이 곧 사회적 신분으로 이뤄집니다.
우리가 바라는 교육의 목적이 과연 이런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아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배운 것을 가지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더 많은 지혜를 발휘하도록 하는 교육을 펼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소양을 길러주는 교육이 바로 나라에서 책임맡은 교육의 목표며 이상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심리까지도 헤아려 세상의 어떤 나라 청소년들 보다도 더 지혜롭게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참다운 실력을 갖추도록 하는 선진 교육이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다음은 제가 이렇게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새롭게 개작한 내용입니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한 젊은이가 오랫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품삯으로 금덩이를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가던 길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고향으로 돌아가 금덩이를 팔아 논밭을 마련할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갈 궁리를 하니 마냥 설레었습니다.
그러다 피곤에 지쳐 잠을 잤습니다. 일어나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부랴부랴 서둘러 주막을 나섰습니다.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재촉하던 젊은이는 깜짝 놀래 멈췄습니다. 봇짐이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금덩이를 자리 밑에 두고 베개로 베고 잔 것을 봇짐에 챙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가슴이 덜컹하여 헐레벌떡 주막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저 만치서 주막 주인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금덩이를 두고 갔더군요. 방을 청소하다 발견하고 얼마나 애를 태울까 하여 이렇게 쫓아왔소."
젊은이는 주막 주인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수없이 하고는 다시 고향으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조금 가니 아이들이 놀기 좋은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하얀 모래밭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습니다. 막 강을 건너가려는데 한 아이가 그만 센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이를 구해야 하는데 헤엄을 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를 우선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는 자기가 가진 것을 생각했습니다. 목숨과 금덩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의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젊은이는 재빨리 품속의 금덩이를 꺼내 높이 쳐들고 외쳤습니다.
"누가 저 아이를 구해 주시오. 내 목숨과도 같은 이 금덩이를 드리겠소!"
그때 벌써 한 청년이 강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냈습니다. 젊은이는 약속대로 그 청년에게 금덩이를 내밀었습니다.
"아니 웬 금덩이를 주려고 하십니까?"
청년은 어리둥절하여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젊은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이를 구해주면 이 금덩이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젊은이의 말에 청년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더 훌륭하군요. 난 그냥 위험에 빠진 아이를 보고 사람의 도리를 했을 뿐인데 당신은 가진 것의 전부를 바치려고 했으니까요."
그때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 왔습니다. 바로 주막 주인이었습니다. 주인은 젊은이와 청년의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칭찬을 했습니다.
"주막 주인이 어려운 나그네를 많이 돕더니 하늘도 돕는구먼."
"그러게 지성이면 감천이라 더니 맞는 말일세. 하하하!"
사람들의 넉넉한 웃음소리가 무심한 강물을 흔들며 멀리멀리 더 넓은 세계로 흘러갔습니다.
이 내용은 ===엄마, 교과서가 잘못됐어요==의 책 22회분입니다.
21회 분까지는 저의 카페에 네티즌의 의견과 함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greatthink
그리고--<산만, 학습장애>를 논리와 논술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상담을 원하시는 학부모님은 연락주십시오.
031-388-5678 이나 안양 평촌신도시 900-2 아트빌딩 206호 정순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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