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단풍은 붉지 않지만.

가을 오후. 창덕궁에 가다.

검토 완료

김용운(ikem)등록 2003.09.24 10:43

종로 3가에서 본 돈화문 ⓒ 김용운

아쉬움을 뒤로하고 종로에 위치한 극장에서 나오니 멀리 창덕궁이 보였습니다. 마침 카메라도 들고 나온 터라 날씨도 좋은데 사진이나 찍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가을 바람이 부지런히 하늘을 맑게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창덕궁은 흔히 비원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조선시대 궁궐입니다. 경복궁과 덕수궁, 창경궁 심지어 경희궁과 운현궁은 가봤지만 정작 매일 지나다니는 창덕궁에 가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 참에 담만 보던 창덕궁에 들어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종로 3가를 가로질러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쪽으로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마침 정문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소풍을 나온 듯한 초등학생들과 관광객들이 어울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이었습니다.

표를 끊고 창경궁에 들어갔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다양한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소풍 나온 초등학교 단체 꼬마들과 함께 안내하는 분의 설명을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생기는 조용한 궁궐을 일시에 소란스럽게 만들더군요.

창덕궁 인정전 ⓒ 김용운

먼저 인정전에 들렀습니다.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 건물은 순조4년(1804년)에 복구한 것으로 조선조 말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국보 제225호 지정되기도 했지요.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이 가을 햇살보다 기분 좋더군요. ⓒ 김용운

아이들은 텔레비전 사극에서 봤다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만 보다가 처음 실물을 접했습니다.

사진기를 잡고 두리번거리니 아이들에게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렌즈를 그 녀석들에게 돌렸더니 모여서 포즈를 취해주더군요.

선정전 가는 길에 ⓒ 김용운

저 역시 마치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아이들을 뒤따라 다니며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을 듣고 계속 셔터를 눌렀습니다.

어릴 적 소풍 갔을 때의 설렘이 다시 마음속에서 울렁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아이들 사이에 껴서 이리저리 수다를 떨며 쫓아다니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돈화문으로 들어와 인정전을 거쳐 신정전과 회정당, 대조전으로 이어지는 창덕궁 관람코스는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궁궐 관람코스라고도 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학교에서 배웠다며 선뜻 영어로 말을 걸어보기도 하더군요.

외국인들도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운듯 손짓 발짓으로 아이들의 짧은 영어에 친절히 답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여유로운 풍경이 보기 좋았습니다.

뭐 찍느냐고 물어보듯. 카메라를 보더군요. ⓒ 김용운

왕과 왕비의 침전이며 왕과 가족들이 생활하던 중궁전으로 쓰인 대조전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왕이 상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보물 제 816호인 대조전에서 아이들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비교적 실내가 온전히 보존되어있는 대조전 안을 아이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진지한 모습들이 새삼스러워 카메라를 갔다 대었습니다.

대조전을 나와 창덕궁의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비원’ 이라는 이름의 연원이 여기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조선 왕실을 낮추려는 의미로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고 창덕궁 후원을 비원이라는 말로 격하시켰는데 아직도 우리는 비원과 창경원으로 부른다고 안내를 하시는 분께서 따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관광 안내책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곳은 여기가 정말 서울 시내의 복판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즈넉하고 선선했습니다. 조선 왕조의 흥망 성쇠를 함께 했을 그곳을 보니 이런 저런 상념에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용정과 부용지 ⓒ 김용운

마침 일본 단체관광객과 그 곳에서 마주쳤습니다. 한때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궁궐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상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유독 부용지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또 십 여분간을 쉬었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부용정 연못가에 작은 파문을 일으킬 정도로 떠들썩했습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주변의 숲으로 갔습니다.

위에서부터 빨강게 물이 드는 단풍나무. ⓒ 김용운

이리 저리 눈길을 주다 단풍나무 윗자리부터 빨갛게 물이 드는 걸 보았습니다. 그 풍성한 가을 햇볕이 수해로 엉망이 된 남녘 지방 평야에도 함뿍 쏟아져 조금이라도 더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방자 여사가 여생을 마친 낙선재를 구경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창경궁 관람을 마쳤습니다. 안내하는 분에게 물으니 10월 중순 단풍으로 물든 창덕궁의 모습이 가히 절경이라고 하시더군요. 창덕궁 안내 팜플렛의 사진도 가을의 부용지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오시면 굳이 단풍을 보러 멀리까지 안 가셔도 될 것이라며 한 번 더 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몰라도 그곳에서 관람객들의 질서를 유지하며 공익근무중인 분들을 보니 무척 부럽기도 했습니다.

옛 조선의 가을 하늘도 이렇게 푸르렀겠지요. ⓒ 김용운

돈화문을 나오는 순간 제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돈화문 앞으로는 차들이 가득 차 있었고 오후의 햇살은 그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조차 인상파의 그림처럼 포근하고 화사하게 채색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스크린 속의 조선시대를 보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을 돌아보며 초등학교 때의 동심과 바쁘게 살아온 일상을 뒤돌아 본 것이 오히려 더 값지게 느껴졌습니다.

창덕궁 돌담을 끼고 돌아오는 길.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을 공원 가로수의 꽃 핀듯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발견하는 기쁨은 오늘 오후 가벼운 일탈의 멋진 마무리였습니다.

꽃 피듯 노랗게 물들어 버린 나뭇잎. ⓒ 김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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