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이게 어찌 이리 작아졌답디까?

영화 스캔들에 대한 몇가지 딴지걸기

검토 완료

김정은(bwkje)등록 2003.10.11 22:25
주의-스포일러 있음!


피에르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을 리메이크했다는 영화 스캔들. 글쎄 서구의 귀족사회와 조선시대 양반사회와의 그림이 부합할까하는 호기심과 "통하였느냐"라는 요상한 영화 카피 덕분에 더군다나 일본사람들이 욘상이라 칭하여 이 영화를 보러 한국여행을 간다고 셜쳐대는 배용준의 첫영화이기에 과연 상투 튼 모습의 배용준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속 내기를 한 채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역시 이재용표 영화였다. 영화 정사에서 인물 선 하나 하나가 섬세하게 드러나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회색톤 대신 누가 그랬듯이 기생과 유유자적 음풍농월하는 한량의 모습이 울긋불긋 잘나타난 신윤복의 풍속화가 절로 떠오르는 화려한 화면을 볼라치면 우리 민족이 정말 백의민족이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색감이 좋았다.

특히 깔끔한 놋그릇에 먹음직스럽고 색색으로 화려하게 차린 음식상을 볼라치면 지난주 덕수궁에서 직접 본 임금님 수라상차림보다 오히려 색감면에서는 더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이 밖에도 이영화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통속적인 상식을 무시해버린다. 열녀문까지 하사받았다는 청상과부는 평생 소복만 입고 몸종 이외에는 일체의 외부인들과 내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존의 상식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정절녀로 나오는 숙부인-그것도 요상한 것이 남편이 정혼만 하고 죽었다는데 벼슬에도 오르지 못한 남편을 둔 과부가 웬 숙부인이라는 외명부 첩지인가 말이다-은 소복은 아예 볼 수 없고 색옷을 입으며 이웃사람과도 대화를 나누고 책방에서 마음껏 실학자들의 책을 사기도 하고 '천주실의' 책을 필사해 나눠주는 등 천주교신자로 활발한 활동까지 한다. 과연 이런 사람에게 열녀문을?? 남편 따라 자살을 해도 나올까 말까했다는데 말이다.

또 놀고 먹는 한량인 배용준이 연기한 조원의 호칭이 군이라는데 왕족도 아니고 반정공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벼슬길에 올라 공을 세워 군으로 책봉된 것도 아닐터인데 어찌 젊디 젊은 나이에 군으로 책봉이 되었는지 그것도 오락가락하다.

또 하나, 임금이 사는 궁 외에는 100칸 넘는 집을 못짓게 하여 99칸이 최고인 사대부집 마당에 배를 띄울만한 큰 연못이 있을 수 있으며, 설령 있다손 쳐도 내외를 엄격히 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인네들이 과연 악공들을 불러 백조모습의 배를 띄우고 유유자적 뱃놀이를 할 수 있을까?

하기사 원래 원작이 남의 나라 소설이고 픽션이니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고 있는 것 없는 것 화려하게 꾸미고 풍경 좋은 소쇄원같은 곳에서 촬영하면 보는 사람의 눈은 만족하겠지만, 너무나 내가 알고 있던 현실과 동떨어진 것같은 괴리감이 들었다.

이제 사족같은 영화외적인 딴지걸기는 그만 하고 영화 초반은 너무 고귀해서 차마 근접하기 어려운 천사와 같은 위치의 숙부인을 무너트리기 위해 바람둥이와 팜므파탈역의 요부가 등장하고, 요부와 바람둥이 이 둘의 사이는 첫사랑인 사촌 남매지간이라는 지극히 아슬아슬한 근친관계라는 흥행적 요소가 녹아있다.

이러한 요소 속에 정절녀 꼬시기라는 가벼운 코믹터치로 흥미를 유발시키며 서서히 끌어가던 이영화가 정절녀가 무너진 중반부터는 갑자기 길을 잃은 배마냥 통속적인 멜로모드에 암울한 비극모드로 급선회하는데 그 속도조절과 내용전개가 영 껄끄러웠다.

능청스럽게 개그맨과 같은 대사를 읊조리며 막상막하였던 배용준과 이미숙이 막판에 가서 진실한 사랑, 가슴시린 사랑을 읊조리고 천하의 바람둥이가 하나의 게임으로 시작했던 정절녀의 마지노선을 너무도 쉽게(?) 무너트리자, 금새 진정한 사랑에 눈떠 전공에 맞지 않은 섯부른 사랑놀음을 하다가 칼맞아 죽는 뻔한 설정은 그렇다 치고, 사랑에 눈 뜬 정절녀는 저 때문에 칼을 맞아 죽은 새사랑을 따라가겠다고 살얼음이 언 호수에 빠져 자살하니 새로운 님을 위한 또다른 열녀 모드로 회귀한다.

새 사랑에 대한 불사이부의 충정(?), 당연히 여기서의 지아비란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배용준을 의미할터이고.. 음 편안한 해석이군. 영화중의 이미숙의 코믹한 대사대로 "마음은 권인호에게, 몸은 조원에게, 시집은 유 대감에게 라던가"... 아니 예전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에서 보여주던 순정입네, 마음입네하는 복고모드와 매우 비슷한 설정이다.

이 뿐인가? 사랑이란 감정을 촌스럽게 여기고 냉혹한 게임의 법칙에 철저하게 익숙하여 냉혹한 승부사로서 세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던 이미숙이 그토록 이기려고 애를 썼던 게임의 경쟁자가 사라지고 남자를 망친 팜므파탈의 역을 충실히 완료하자, 갑자기 첫사랑이었다는 사촌동생이 주어 고이고이 숨겨놓은 마른 꽃잎을 꼭꼭 싸둔 손수건을 펼치며 사랑했노라고 사랑이었노라고 가녀린 여인이 되어 바들 바들 떨며 불쌍한 듯 통곡한다.

게임으로 시작했던 가벼운 사랑놀음이 결국 세사람의 진실한 사랑이 꼭꼭 숨겨져 얽히고 섥힌 애증이라는 사실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겠지만 그러고보니 모든 코드는 또다시 사랑, 사랑 타령이다.

그렇다면 "이래도 사랑, 저래도 사랑"을 설명하는데 퓨전 사극이라 거창하게 내세운 그런 화려한 복식과 코미디 같은 과장된 대사가 과연 필요했을까? 그러한 대사에 나 또한 웃었지만 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면 너무 포장만 요란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이게 어찌 이리 커졌답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며 순진한 도령을 유혹하던 이미숙의 대사처럼 이 영화 또한 호기심만 잔뜩 키워 관객을 유혹하다가 중반에서 바람이 푹 빠져버린 김빠진 풍선과 같은 꼴이 된건 아닌지.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