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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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영(bgsdy)등록 2003.11.19 15:22
이웃에 대한 배려가 실종 된지는 이미 오래다. 이성보다 먼저 존재한 감성의 산물인 예술조차도 모더니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어쩌고 하며 모든 장르에 대한 발전적 해체를 주장할뿐더러 핵가족의 붕괴가 무슨 서구문명을 따라가는 지름길인양 너도나도 개인주의로 향해 치닫는다,

모든 것은 나로 향해 있어야 하고 세상의 모든 이치나 제도, 법, 관습 따위는 나만 위해 존재해야 직성이 풀리지 더불어 사는 세상 운운하는 것은 덜 약은 사람이거나 오히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충정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개인주의 팽배, 의식주 모든 것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이미 그 자체로 탄력을 받아 관성에 끌려 굴러가는 세상처럼 보인다. 관중은 아랑곳없다.

편리성, 용이성, 집중성.. 닭장처럼 층층이 쌓여있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고층아파트도 부족해서 무슨 타워 벨리스니 초고층주상복합이니 하며, 그냥 집이라고 하면 아 사람이 사는 집이구나 하면 될 것을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희한한 외래어를 분해 조립 결합해서 신조어를 만들고 난 뒤부터 하늘도 빙글빙글 돌고 세상도 빙글빙글 돌고 그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을 분노로 만들어 비벼대느라 정신이 없다.

남이 잘되는 것은 절대로 못 보는 개인주의의 팽배, 잘되면 내 탓이고 안되면 사회 탓으로 돌리는 고질적 망국병인 개인주의는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부모도 믿지 못하고 형제도 믿지 못한다. 법도 믿지 못하고 제도도 불신한다. 처음엔 내가 믿었지만 얼마 안가 믿는다는 것이 별 효용이 없다는 것을 사회를 통하여 깨닫고 난 뒤부터 출발하는 것이 개인주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은 헌법조문의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처럼, 그냥 그런 말이 있나보다 정도로 여기고 살아야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사는 사람은 사회성이 미달되거나 어딘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만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이 나라에서 재현되고 있다.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공교육 붕괴니 사교육의 폐해니 말들이 많은 것 같지만 가만히 내막을 들여다보면 갈수록 교육백년지대계라는 거대한 기둥 곁에 붙어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주장이거나,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 살지 못하는 자기현시욕이 강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룰 뿐, 보통의 학부형들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뜻도 알아듣기 힘들다.

그래도 학부모 입장이라 무슨 말인가 좀 알아볼라치면 어느새 주제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서 또 다른 목소리로 조령모개 타령이다.

초고층아파트가 구름 곁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만큼이나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다. 그래도 동서를 막론하고 동방예의지국이라 하면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대한민국이었는데 가능하면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인간성회복운동을 하는데 있어 공교육이 좋으냐, 자립형이 좋으냐 등등의 문제를 핵심으로 삼아 교육백년지대계 운운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봐도 '빨리빨리'지나가는 숫자맞추기 게임에서 눈치로 때려잡는 적응훈련에 얼마나 유능한 조련사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 인간성회복에 대한 걱정은 아닌 것 같다.

무슨 말만 꺼내면 돈타령이고 무슨 말만 꺼내면 질 높이 타령인데, 이것도 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학생들이라는 기둥에다 서로 자기 못박기 시합이지 아이들 상처 입는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세상이치라는 것이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다 따라보고 배우는 것인데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 어른들 하는 것을 대물림한다는 것은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다.

돌멩이를 공중에 던지면 어느 시점에서는 떨어지게 마련이고 세상이 싫다고 하늘로만 오르던 수중기도 일정한 시간이 자나면 다시 떨어진다. 발전적 해체도 좋고 개인주의도 좋고 높이가 90M에 불과했다던 바벨탑보다 더 높은 초고층 아파트도 그 보다 더 미세한 입자나 더 높은 고층을 지을 수 있어 아쉬운 대로 견딘다고는 하겠지만, 개인주의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무엇이 남을까를 생각하면 답이 안나온다.

망국병의 출발인 개인주의의 시작은 어디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부엌 하나, 안 방 하나 건너 방 하나, 합쳐서 오순도순 살던 초가삼간의 해체부터 개인주의는 예고된 것 같다.

흥부네 식구들이 홑이불 하나에 아홉 명의 모가지를 들이밀고 살아도 행복했듯이. 없이 살아도 희망하나로 방 한 칸에 어머니, 아버지, 오빠, 누이, 동생들이 이부자리 하나에, 비록 그것이 잠결에 서로의 발목을 허벅지를 종아리를 부벼대는 것이라도, 그래서 딸이 아버지의 가슴에 발을 얹고 자는 것이 조금 민망하더라도 그게 잠결이라서 괜찮았듯이. 서로의 살을 부벼 대며 온 밤을 지새우고 살 때에는 개인주의라는 것이 없었다.

바가지에 담아 온 삶은 고구마 두 어 개에 동치미 그릇이 놓인 방을 중심으로, 어머니는 문지방에서 헤진 옷을 꿰매고 아이들은 사과궤짝을 책상 삼아 공부를 하고 누이가 만화책을 보더라도, 하다 못해 아버지가 탁주를 마셔도 안 방 아랫목에서 마시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셨으므로, 가족은 식구들이 무엇을 하는지 다 보고있었으므로 가족에 대한 불신이 끼어 들 틈이 없었다.

요즘처럼 문을 탁 닫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아이가 컴퓨터를 하는지. 어머니가 문자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지 아버지가 고민을 하는지, 다른 생각을 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으므로 가족은 한 몸이고 의사가 통했다. 말을 안 해도 무엇이 먹고 싶은지,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한지, 가지고 있는 고민은 무엇인지, 느낌으로 알아듣고 느낌으로 사랑하며 살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혹여 가족 중에 누군가가 다른 마음을 먹으려고 하다가도 한 몸인 가족에게 누가 될까 싶어 행동하기 전에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도 살면서 체득하는 교육의 원천이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전설이 된지 오래다. '빨리빨리' 돈을 벌고 '빨리빨리' 출세해서 흙담집에서 벽돌집으로, 벽돌집에서 연립으로, 연립에서 아파트로, 빌라로, 고층으로, 초가삼간에서 열여덟 평으로, 서른 평으로 마흔 평으로, 자꾸 자꾸 평수가 늘어나면서 오십 평 백 평의 수만큼이나 많이 달린 현관문 베란다, 안방 건너 방 작은 방, 서재, 침실, 홈바, 등 각자의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문도 많아진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넓은 집에서 살 수록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문을 걷어 닫고 살며 가족의 붕괴를 더 악화시키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높고 넓은 것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는 사람들, 그것이 능력있어 보이는 사회, 아마 교육도 거기에 맞추어 아부하느라 참을성 없는 개인주의자들만 양산해내는 것은 아닐까 싶다.

변죽만 건드리는 문명,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혼자만 잘살면 재미없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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