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 '정' 들었습니까?

[민경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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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진(jean)등록 2004.01.04 17:51
情 든다고 합니다. 미운 정도 들고 고운 정도 듭니다. 자주 보고 오래 살다 보면……

연인이나 부부가 매일 상대의 점수를 매겨 같이 살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상대의 장단점과 관계 없이 오랜 세월 알고 지내며 쌓게 된 정이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情은 브랜드 관리에 있어서도 핵심입니다. 일견 돈 낭비 같은 이미지 광고에 기업들이 많은 돈을 쏟아 붇는 것은 소비자에게 기업의 이미지가 친숙해 지도록, 즉 정들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고민해서 선택해야 할 고가품이 아니라면 단순 소비재는 소비자들이 자사의 브랜드에 정을 붙이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마케팅 수단입니다.

최근 할리우드의 흐름 중 하나는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속편 혹은 3편 이상의 개봉을 전제하고 제작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매트릭스>, <터미네이터> 시리즈 등이 그것인데 이는 원작 단계부터 혹은 1편의 개봉을 통해 영화 팬 사이에 축적된 친숙한 영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개봉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홍보를 할 필요 없이 효과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미 1편 제작 시 많은 돈이 투자된 촬영 세트의 활용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입니다.

스타 파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할리우드나 한국의 영화계나 대작 영화에 스타를 선호하는 것은 관객들 사이에 이미 익숙해 진 스타의 이미지를 단순 차용하기만 해도 영화의 흥행을 어느 정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스타에게 정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영화사 입장에서는 치밀한 관리와 팬들에 대한 지속적인 노출을 통해 영화 배우의 스타 파워를 꾸준히 가꾸는 것이 매우 중요해 집니다.

서울의 한 멀티플렉스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개봉 작들과 곧 개봉될 영화들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너나 없이 드잡이를 하고 있었는데 제 눈에 놀라왔던 것은 한국 영화가 극장 내 홍보 공간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욱일 승천 하는 한국 영화의 상승세를 확인하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한국 영화가 최근 화제작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배급 담당자들에게 극장의 이런 모습은 공포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리우드 스타 군단이 한국의 영화 팬들과 정이 들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관객의 정이 잦아들고 나면 후에 아무리 훌륭한 영화를 들고 나온다 해도 흥행 성공의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단순히 극장 홍보 공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 그리고 일상의 대화 공간(meme-sphere)에서 대중이 개봉 영화라는 화제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의 절대량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대화와 홍보 공간의 그릇 크기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첫 번째 화제의 자리를 어느 영화가 차지하느냐는 그 영화가 흥행 대작이 되느냐 마느냐를 결정 짓는 대단히 중요한 관건입니다. 이런 사태가 한 두 번도 아니고 거의 2년이 넘게 지속된다면 할리우드의 스타 파워 역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섣부른 판단인지 모르지만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약세는 마치 `90년대에 K-팝의 사운드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수 많은 가수들이 군웅할거 하면서 미국 중심의 팝 음악이 30~40대의 전유물로 전락해 버린 전철을 다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케 만듭니다.

1980년대는 하이파이 오디오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고 고성능의 오디오 시스템에 길들여진 한국인의 높아진 귀를 만족시켜 주기에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 하던 한국 대중 음악의 사운드는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음악 팬들은 수준 높은 가창력과 첨단의 프로듀싱 능력을 자랑하는 미국과 서유럽의 팝 음악에 경도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당시 팝 음악의 팬들은 영어 가사가 아니라 사운드를 즐겼습니다.

지금도 국내 팝 음악의 팬 덤이 30~40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이후 갑자기 향상된 사운드와 가수 진용을 내세우며 `90년대를 평정한 K-팝 세대와 팝 음악 세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팝 음악계는 스타 파워와 수준 높은 음악으로 국내 음반 시장을 꾸준히 두드려 왔지만 한번 K-팝의 스타들에게 익숙해진 20대의 젊은 음악 팬들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情이 든다는 것은 이처럼 무섭습니다.

최근 필자가 관람한 한국 영화의 제작 수준은 경이적일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촬영이나 조명 같은 기초적인 프로덕션 밸류 뿐 아니라 (물론 오디오는 아직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나리오와 마케팅 기법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크게 뒤지지 않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때 예산 부족으로 조명을 감질나게 쓸 수 밖에 없어 외국의 평론가들에게 한국 영화는 왜 모두 어두침침한 '필름 느와르' 일색이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는 웃지 못할 사연을 떠올려 보면 전반적인 프로덕션 밸류의 향상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만약 이런 경향이 수 년간 지속되어 신세대 영화 팬들이 할리우드 대신에 한국의 스타들과 정을 쌓을 기회를 절대적으로 많이 갖게 된다면 할리우드 스타들은 추후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들고 온다 해도 아예 선택지의 후보에서조차 밀려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평균적인 영화 팬의 화제를 점유할 수 있는 영화의 수는 많아야 한 번에 4개를 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산업으로서 한국 영화가 `90년대 K-팝의 영화(榮華)를 재현할 수 있을 지, 또 양적 성장의 속도만큼이나 예술적인 성취 역시 이룰 수 있을 지 주목되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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