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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 한겨레 기자
'아, 거절했어야 하는 건데….’'올해 나를 열받게 한 인간’을 써달라는 청탁 전화를 받았을 때, 난 친구랑 돼지족에 소주 한병을 비우고 두 번째 병을 거의 비워가고 있었으니, 나름대로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술기운만 아니었어도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했을 거다. 지금 난 머리가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열받을 일이 지천인데, 올 한해 나를 열받게 한 인간들을 일부러 떠올리며, 그걸 글로 어떻게 쓸지 고민해야 하다니…. 낭패가 따로 없다.
얼마전 택시를 타고 가다가 차를 몰던 운전수 아저씨한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있던 그는 갑자기 내게 "아저씨, 인간과 사람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라는 거 아닌가.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요령부득일 수밖에.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그는 말했다. "거 있잖아요. 사람같지 않은 짓만 하는 년놈들. 그런 걸 인간이라고 하죠.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야, 이 인간아, 인간아’라고.”듣고보니 그럴 듯도 했다. 아마도 그때 라디오에선 그가 인간이라고 하는 이들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참 신기한 일이다. 내게 글을 청탁한 이가 보낸 메일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참여사회 송년호에 '올해 나를 감동시킨 사람들'과 '올해 나를 열받게 한 인간들'을 기획했다고. '감동시킨 사람'과 '열받게 한 인간'이라. 같은 뜻의 두 단어 가운데 한글을 한자의 앞에 놓는 이 말들에서, 민중의 가치지향을 읽는다면, 너무 오버하는 건가? 처음엔 남들도 다 동의할만한 ‘나쁜 놈들’은 빼놓고 쓸까 생각했다. 그러다 마음을 바꿔먹었다. 어차피 글 쓰다보면 몸도 마음도 정상을 벗어나 발열상태에 들어설텐데, 이참에 올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인간들이 누군지 가만히 손꼽아보기로. 그리고 이 글을 쓴 뒤론, 사람 미워하지 않으며 지내도록 애써야겠다고.
아 그런데, 이건 또 뭔 일인가. 세상에 하늘의 별처럼 착한 사람이 많은 것처럼, 못된 인간 또한 셀 수 없이 많을 텐데, 왜 이리 떠오르는 인간이 몇 안되는 것일까. 올 한해 내가 사랑과 자비는 커녕 분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살아왔단 말인가….
이 보다 더할 수 없다.
글 써달라는 전화를 받는 순간, 바로 떠오른 인간이 있기는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봤을 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온 답변의 주인공은 예외없이 일치했다. 조지 워커 부시. 아메리카합중국의 현직 대통령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듯이 행동하는 인간, 옳고 그름은 자기만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인간, 사람뿐 아니라 풀, 벌레, 나무, 강 등의 지구식구들도 마구 무시하는 인간. 하늘에 구멍이 나든 말든 교토의정서를 똥 볼 차듯 다루고, 유엔을 무슨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하게 여기는 세계 최고 권력자. 이 인간에 대해 내가 달리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일러 무엇하리.
난 가끔 대통령 부시가 아닌, '인간 부시'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다. 여기서 부시의 정신세계를 어림짐작하기 위해 그의 개인사를 소개할까 한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듯‘텍사스 총잡이’출신이 아니다. 부시는 아메리카합중국 동북부의 이른바‘명문가’출신으로 명문이라는 예일대를 나왔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대단하던 때 대학을 다녔지만, 그는 반전운동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영화 <스컬스>의 실제 소재인 최고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 15명만 가입할 수 있다는 예일대 학생들의 비밀결사인‘해골과 뼈’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다수 예일대생들은 이 비밀결사를 경멸했지만, 부시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학생 시절 술 잘 마시고 잘 노는 그런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자신을“절제할줄 몰랐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자제력이라고는 없었다”고 회상했다.
내 생각엔 그때나 지금이나 부시는 별로 자제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덧붙이자면, 술과 놀이로 자제력을 잃는 게 사람 목숨 놓고 자제력을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하여튼 한때‘술주정뱅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그는 불혹이 되기 한해 전인 1985년“그레이엄 목사가 내 가슴에 씨를 하나 심어주었고 나는 바뀌기 시작했다.”는 부시의 말이다. 부시는 이후로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생활태도도 청교도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한다고 한다. 잠도 일찍 자고. 사람들은 그를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선’과 같지 않은 것은 모조리‘악’으로 간주하는.
교회엔 친구 만나러, 또는 취재하러 가본 적밖에 없는 나로선 기도가 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도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관용의 미덕을 안겨줄 거라고 짐작하기는 한다.
하여 나는 참으로 궁금하다.‘부시는 날마다 무엇을 기도할까?’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참으로 중차대한 궁금증이 있다. 내년 대선에서 재선되기를 바라는 독실한‘어린 양’부시의 기도와, 지구마을 수많은 사람들의‘제발 부시를 세계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내쫓아달라’는 기도 사이에서 하늘에 계신다는 하나님은 누구를 향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지. 아, 정말 궁금하고, 또 걱정이다.
부시 못지 않게 나를 열받게 하는 인간은 도널드 럼스펠드다.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긴 얼굴, 일흔을 코앞에 둔 노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건장한 체구. 그 멀쩡한 육신 안에'악마의 영혼’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게 참 실감나지 않는다.
왜 그를 보면 자꾸 어릴 적 철없이 좋아했던 영화 <람보>가 떠오르는지도 잘 모르겠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 직후인1975년 43살의 나이로 아메리카합중국 사상 최연소 국방장관에 임명된 총명한, 그러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에 무지하게 밝은 인물이라는 평이 많다.
그가 얼마전 한국에 왔을 때 한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어른거린다. 펜타곤 자기 집무실 책상 유리에 한반도 위성사진을 끼워놓고 늘 보곤 한다던 그 말 말이다.
밤인데도 휘황한 휴전선 남쪽과, 오직 하나의 밝은 점뿐, 모든 곳이 칠흙같은 암흑인 휴전선 북쪽의 모습이 자유와 억압의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나 뭐라나.
아마도 그가 말하는 휴전선 북쪽의‘오직 하나의 밝은 점’은, 럼스펠드 식으로 말하면‘악의 화신인 독재자 김정일이 있는 평양’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그는 그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중동에‘민주혁명’을 일으키겠다고 이라크를 짓밟았듯이, 한반도에서‘악의 화신’을 몰아내기 위해….아,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다. 겁난다.
"내 재산은 29만1천 원 뿐이오"
이제 눈길을 한국으로 돌려보자.‘어느 넘이 있더라….’전두환.
오래도록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지내던 내 신경을 전두환이라는 인간이 건드리기 시작한 건 지난 6월 그가 서울지법 서부지원의 재산명시 신청사건 재판에 출석해 자기 재산은 29만1천 원의 예금뿐이라고 말을 한 때부터다. 천하의 전두환이 전재산 29만1천원인 가난뱅이라니.
그런데 주간 『시사저널』보도를 보면, 그는 요즘도 한주에 2천만원에서 5천만원 남짓을 쓴다는 게 전두환의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던 한 검사의 전언이다.
이 둘 사이의 치명적 불일치를 해소할 수 있는 루트는 전두환이 거짓말을 했거나, 그가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갖고 있을 것이라 전제하는 수밖에 없다.
검찰은 1995년‘전두환씨 비자금’사건 수사 때 전씨가 국내 기업체들로부터 2천억원대의 비자금을 받아, 이 가운데 1천억 원대의 자금을 수백개의 가·차명 계좌에 나눠 예치하거나 무기명 채권 또는 양도성예금증서로 숨겨놓고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1997년 전씨에게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 판결했으나, 지금까지 갖은 재주를 동원해 추징금의 14%인 314억원만 냈다.
이는 2628억 원 가운데 2075 원을 낸 노태우씨와 참 다른 실적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전두환이 돈세탁의 프로라면, 노태우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고 했다. 전씨는 또 가족이나 측근이 왜 추징금을 갚아주지 않느냐는 지난 6월 재판부 질문에, “그 사람들도 그저 먹고 사는 정도여서 도와줄 형편이 못된다”고 했단다.
그런데 전씨의 큰 아들 재국(43)씨는 출판사 시공사를 운영하며 뚜렷한 수익원도 없이 문어발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재국씨의 부동산재산은 100억원 남짓을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추정이다.
그의 열네살난 아들은 시가 10억 원이 넘는 서울 서교동에 있는 땅 86평을, 열일곱살 난 딸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116평짜리 음식점 지분 70%(30억원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씨쪽은 재국씨의 장인이 외손주들을 위해 물려준 것이라고 하는데, 그 장인은 세상을 뜨기 전 강남의 13평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한다.
전씨의 둘째 아들 재용씨는, 검찰이 현대 비자금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명동 사채 시장에서 자금세탁을 한 괴자금 100억원의 소유자임이 밝혀져 세간의 눈길을 끈 적이 있다.
대우증권 등에서 회사원 생활을 2년 4개월 남짓 한 경력밖에 없는 그가 갖고 있던 100억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돈을 왜 세탁하려 했는지, 판단하려면 꼭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려야 할까.
지난 11월18일엔 법원 경매에 나온 전씨의 연희동 별채를 그의 처남인 이창석씨가 감정가 7억6449만780원의 두배가 넘는 16억4800만 원에 낙찰받았다. 전씨가 타고 다니는 에쿠스 승용차도 창석씨가 제공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그저 먹고 사는 정도여서 도와줄 형편이 못”되는 인간들인가? 전두환씨는 지난 6월 법원에서 자기 재산이 29만1천 원이라고 밝히며“본인은 양심에 따라 사실대로 재산목록을 작성해 제출했으며, 사실과 다르거나 누락된 내용이 있으면 처벌받겠다”고 선서했다.
잔머리가 대단한 '좀도둑’전두환씨도 처벌받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한나라당 최정예 전사들
처음엔 약속한 원고지 25장을 뭘로 채우나 했는데,‘나를 열받게 한 인간’3명에 대해서 쓰고 나니 벌써 25장을 넘어서고 있다. 마음 속에 이렇게 미움이 많아서야, 도대체….
그래도 모처럼 찾아온, 만천하에 '이 인간들이 나를 열받게 했다’고 고할 수 있는 기회에 꼭 언급할 인간이 있다.
이재오 한나라당 사무총장 겸 당 비상대책위원장, 김문수 한나라당 대외인사영임위원장.
이들은 80년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광주의 살인마’라 부르며 민주화운동의 전선에서 나섰던 이들이다. 민중당을 만들어 오른쪽 날개로만 나는 한국정치에 좌파 정당을 안착시키려 하기도 했던 그들은, 지금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신한국당의 집권을 위한‘최정예 전사’로 꼽히고 있는 이른바 '나바론 특공대’핵심이다.
김문수씨는 95년 국회의원 선거 때 부천소사구에서 박지원씨를 누르고 국회의원이 됐는데, 그때 나는 『한겨레2』기자로 그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세상 인심이 참 무섭더라고요. 당선되기 전에는 부천역에서 그렇게 허리굽혀 인사를 해도 아는 체를 하지 않던 이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소식이 알려지기가 무섭게 제 사무실로 화환을 보내오고 축하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수구세력의 품으로 달려든 그를 미워하기보다 좀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하여 나는 궁금하다. 저 엄혹했던 전두환 폭압기에 자기가 주도적으로 조직했던 연대운동의 전설이었던 구로동맹파업을 그가 지금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세기가 바뀌었건만 아직도 노동자들이 삶의 슬픔과 분노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세상을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신용불량자들 줄 서, 이라크로 가자!
또 한명을 여기에 적어둔다. 송영선 국방연구원 소장.
“위험수당 200만원만 준다고 하면 이라크에 갈 사람 수두룩하다”“신용불량자같은 사람들을 뽑아 이라크에 보내야 한다” “(이라크에)파병한다고 (미국한테) 뭘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거지근성이다”
이 막말의 주인공에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다. 그가 국방부 대변인에 내정됐다가 철회됐다는 해프닝이 벌어졌을 때, 『조선일보』출신 심양섭 한나라당 대변인이 내놓은 논평은 나를 또한번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내용은 이렇다.
“국방부 대변인에 내정되었다가 철회된 송영선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 소장은‘입이 있어도 말할 자유는 없는’오늘날 한국사회의 희생자이다. …, 더욱 슬픈 것은 한국이 이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 단색사회의 희생양은 송씨만이 아니다. - 자기와 다른 사상과 이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진실은 잠시 가릴 수 있지만 영원히 덮어둘 수는 결코 없다.”
이 논평을 보면, 그들도 차이의 인정과 관용이 민주주의의 핵심 기반이라는 점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더 절망한다.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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