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권근 소방관 ⓒ 이수정
“시골집에 다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차가 막히는 구간이 아닌데 갑자기 막히더라고요.‘사고가 났구나’라고 직감하고 보았더니 중앙선을 넘은 자동차와 덤프트럭의 충돌 사고였습니다. 정말 큰 사고였는데 안타깝게도 운전자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옆 좌석에 탔던 사람은 부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6년 전 있었던 사고 현장을 회상하는 대전 도룡소방파출소 곽권근(38) 소방관은 교통체증으로 구급차량이 도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혼자 힘으로 구급활동을 펼쳤다. 부상자에게는 자동차의 시트를 뜯어내 보온 조치를 하고, 사고 차의 유리를 깨고 시신을 꺼내 수습하는 열정을 보였기에 주변에서는 지금도‘참 소방인’이라는 얘기를 하고있다.
현재 구급대 업무를 맡고 있는 곽 소방관에게는 구급 상황이 발생하는 사고현장은 각별하다. 어떤 사고 현장이든 부상자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92년 12월, 화재 진압대원으로 소방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초창기 화재 진압에 나섰던 ‘충남방적 화재 사건’을 잊지 못한다. 새벽 3시에 난 불을 공기 호흡기를 3개나 바꿔가며 진압할 정도로 피해가 큰 현장이었다.
곽 소방관이 당시의 화재 현장을 잊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사건으로 동기들이 소방관 생활을 접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곽 소방관이 쉽지 않은 길을 택한 이유는 보람 있고,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어서다.
“소방관은 비록 항상 대기해야하고 긴장되는 힘든 직업이지만 자긍심을 갖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현재 구급 대원으로서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형편이 좋지 못한 시민들을 구급했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병원도 갈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려운 산모가 있었어요.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니 혼자 아기를 낳았더라고요. 이송하면서 구급차 안에서 탯줄도 잘라주고 아이를 따뜻하게 해줬죠. 어린 생명을 살려냈다는 생각에 정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같은 구급 현장에서도 심폐 소생술로‘조금만 힘을 내세요’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며 병원으로 급히 이송했지만 좋지 않은 소식을 접할 때면 마음의 허탈감도 지울 길이 없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위급한 환자들 곁에서 함께 하기에 노력 끝의 허탈감은 크게 다가온다.
그는 벌써 10년째 산을 오르고 있기도 하다. 촌각을 다투는 구급 현장에서 구조대의 체력은 곧 부상자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럿이 어울려 오르는 산의 정취도 좋지만 혼자만의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좋아 주로 혼자서 다녀오곤 해요. 산에서는 요령을 피울 수 없잖아요. 열심히 오르는 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이지요.”
근무가 없을 때면 자연스레 산을 찾는 곽 소방관은 배낭과 함께 직업의식을 함께 챙긴다. 압박붕대, 진통제, 파스는 그의 배낭 속 깊숙한 곳에 제일 먼저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들이다. 그는 산을 오르면서 만나는 부상자들에게 응급 처치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일에 대한 곽 소방관의 애정이 이렇다보니 제일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에게 그는 ‘우리아빠 최고’가 됐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의 학부모 수업에 초청돼 소방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후 팬레터는 물론이고 ‘아빠 보러 가자’는 어린이 팬들이 늘어가고 있다.
곽 소방관은 앞으로의 생활을 ‘지금 같은 생각과 자세’로 소방관 생활을 이어갈 계획이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백두대간을 종주할 계획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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