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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이 오랜 논쟁에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주간지 <요미우리 위클리> 신년호에서 1972년 11월 2일 평양 교외의 헬리콥터 공항에서 손에 꽃을 들고 한국 대표단을 기다리는 북한 소녀들 속에 3번째로 서있는 '김현희'를 공개한 것이다.
요미우리 신문기자가 찍은 이 사진 속에 나타난 소녀는 도쿄치과대학 하시모토 마사지(橋本正次) 조교수의 감정 결과 눈썹·눈·코·입술 등의 위치관계, 그 형상이 김현희와 동일인임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KAL 858기 폭파는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자국민을 몰살시킨 사상 최악의 음모로 국가안전기획부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김현희를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하여 실행했다"는 주장은 일단 상당 부분 설득력을 상실할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KAL858기 폭파사건과 관련하여, 안기부의 졸속처리와 무성의, 대통령 선거 전날 범인 김현희를 입국시켜 결과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이바지한 점, 유족들의 감정을 무시한 일방적인 사건처리 등이 결론적으로 16년간 유족들의 한을 쌓아 왔으며 수지김 사건 등 수많은 공안사건을 조작해온 안기부에 대한 불신감이 김현희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던 만큼 조작으로 의심하게 만든 제 1원인은 정부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족들의 서러움과 슬픔은 단지 정부의 졸속 처리나 김현희의 고백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리라. 그러나 이러한 설명 부족은 유족들뿐 아니라 김현희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신부 115인 등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시하고 노다 미네오(野田峯雄)씨 등 일본인 프리랜서조차 "이 사건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사건이 조작되고 진실이 날조됐다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는 국가가 개입됐을 것으로 확신한다"(2003년 12월 1일 <오마이뉴스> 보도)라며 조작을 확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건을 차분하게 되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음모에 길들여져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와 방관이 이러한 의혹을 증폭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조금만 살펴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안기부가 불신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명확한 증거물이 없이 모든 부분을 김현희의 증언에 의존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기에 유족들로서는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당연히 의혹의 증폭은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었다는 사실 증명은 바로 김현희의 고백으로 시작된 일본인 납치문제의 대두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에게 있어 북일국교수립의 양보할 수 없는 전제조건으로 굳어지기까지 한 이 일본인 납치사실이 세계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김현희의 고백에서였던 것이다.
김현희, 일본명 하치야 마유미(蜂谷由美)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일본인 교사, '이은혜'로 불린 여성이 바로 납치되어온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최초로 김현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일본 경찰은 이은혜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직접 김현희를 면담, 김현희의 진술을 바탕으로 몽타주 작성 등 사상 최대의 탐색작업을 벌였고 이은혜가 바로 타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라는 여성임을 밝혀내게 된다.
이은혜가 타구치임을 알게된 결정적인 실마리는 김현희의 이은혜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치토세 혹카이도 공항의 이름을 신문에서 본 김현희는 이은혜가 자기에게 지어주려고 했던 이름이 바로 “치토세”였음을 일본 경찰에게 진술하고 일본 경찰은 이 치토세라는 이름과 실종자를 추적한 끝에 바로 타구치가 실종되기 전에 이 “치토세”라는 음식점에서 일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타구치의 오빠가 동생이 북한으로 납치되어 대한항공 폭파범의 일본어교육을 담당해 테러를 도와줬다는 사회적 질책이 두려워 실종을 부인해 오다가 한참 뒤에서야 자기 동생이 실종되었으며 몽타주의 인물임을 밝혔다.
김현희의 진술로 일본인 납치자 타구치 야에코가 수사선상에 밝혀지면서 그동안 외면되어왔던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봇물같이 터졌다. 결국 2002년 9월 17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고이즈미 일본수상과의 평양회담에서 김정일 총서기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납치자 전원의 실태와 현황을 밝힘과 동시에 생존하고 있는 납치자 5인을 일본으로 일단 귀국조치 시키게 된다.
북한은 물론 KAL기 사건을 남한에서 꾸민 조작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이은혜라고 일본 경찰이 지목한 타구치 야에코의 납치를 인정하였으나 그는 북한 이름이 고혜옥이며 지난 198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KAL기 폭파사건을 북한의 행위로 보고 1988년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정, 아직까지도 해제를 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미국이 북한을 바라보는 근본 시각이 되어 있다.
KAL858기의 폭파사건 이후 잔해 하나 발견 안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항공기 추락 사상 전혀 불가해한 사실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 여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사건을 대처하는 면에서는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고 또한 현재 유족들의 끈질긴 재수사 요구 앞에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정정당당히 서지 못하는 모습은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키고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유족들과 진상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정부차원에서 정보를 공개하여야 할 것이며 유품수색과 보상문제에 있어서도 재검토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김현희씨 가족의 잠적 보도이다. 살인자, 폭파범이라는 죄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그녀에게 있어 유족들과 진상위원회의 질타는 깊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가족이 모두 잠적했을까 안타까운 것이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유족들의 오열과 억울함, 한과 절망을 생각한다면 피할 것이 아니라 다시 그들 앞에 서야 할 것이다. 도피만이 해답은 아닐 것이다. 유족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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