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한국 땅 닛뽄도(日本島)는 우리 땅

일본은 반일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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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ensagas)등록 2004.01.17 16:07

오사까 성 ⓒ 이정근



새해 벽두부터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태평양 전쟁의 일급 전범들이 봉안되어 있는 신사(神社)를 전격 방문하여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심기를 건드리더니만 우리의 독도 우표 발행에 시비를 걸고 나섰다.

독도(獨島)가 자기네 다께시마(竹島) 라고..., 참으로 어이없고 가증스럽다. 속 좁은 섬나라 민족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망언을 일삼는 일본인들에게 독도를 줘 버리고 대마도(對馬島)는 우리 것이요, 닛뽄도(日本島)도 우리 것이니 내놓으라고 하면 어떨까? 억하 심정에서 나온 공연한 얘기가 아니다.

조선 실록을 살펴보면 세종1년, 그러니까 1419년 6월19일 남해안에 상륙하여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약탈해 가는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삼군 체찰사(體察使) 이종무 장군을 선봉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의 항복을 받아내고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는 조선 땅이며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속한다' 는 서찰을 대마도 도주에게 전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은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에게 교지를 내려,"대마도 백성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할 지어니 이제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는 대마도란 섬에도 윤리와 도덕이 통하도록 하여 멸망의 화를 자초하지 말지어다" 라며 근엄하면서도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고 있다. 이때의 역사를 을해동정(乙亥東征)이라고 조선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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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일본은 반일(反日), 반일만 외쳐 댈 대상이 아니라 극복(克復)의 대상이다

우리가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일본이 근세에 들어와서 조금 일찍 개방에 성공하여 조금 잘 산다는 것뿐이지, "우리 한국이나 중국보다 훨씬 뒤떨어진 문화에서 살았었구나" 하는것을 금방 발견하게 된다.

일본 음식 문화에는 숟가락이 없다. 모든 일본 음식은 젓가락으로 시작해서 젓가락으로 끝난다. 젓가락으로 해결이 안 되는것은 그냥 손으로 집어 먹어야 한다. 국물은 된장 국물이 됐던 우동 국물이 됐던 국그릇을 손으로 들고 훌훌 둘러 마셔야 한다. 그것도 소리를 크고 많이 내야 주인이 좋아한다. 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비 문화적인 음식 문화인가?

한 나라와 한 민족의 문화의 우열을 가리는데 있어서는 학자마다 다른 척도와 방법을 제시하겠지만 가장 설득력을 인정해주는 방법은 그 민족이 고유의 말(語)과 글(文)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방법이다. 또한 그 민족의 음식 문화에서 숟가락을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로 가름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지구상에 있는 여러 민족 중에서 숟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은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민족은 조금은 저열하기 때문이다.

일본 음식 문화에는 숟가락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혼슈(本洲)에 있는 일본인들은 후지(富土)산을 중심으로 개미 쳇바퀴 돌듯 살아야 했다. 어디 빠져나갈 곳도 삐져나갈 곳도 없는 삶이었다.

우리 민족은 위에서 압박하면 바다를 건널 수 있었고 아래에서 압박하면 위로 피할 수 있었다. 실례로 일제시대에 악랄한 일제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만주로 흑룡강으로 빠져 나갔잖은가

동물 생태 학자가 비좁은 공간에서의 동물의 생태와, 넓은 공간에서의 동물의 생태를 연구발표 한 바에 의하면 비좁은 공간에서 성장한 동물은 같은 종으로부터의 스트레스에 시달리어 동족을 살해하고 스스로의 꼬리를 물어뜯는 잔인함과 엽기성을 보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잔인하고 성적(性的)으로 변태적이며 엽기스러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인은 훈도시(팬티역활의 헝겁 조각)에 칼 한 자루 메고 섬나라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들에게 믿는것은 오로지 칼 이었다.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것은 오로지 칼 뿐이었기 때문이다. 외톨이가 아니라 떼거리로 뭉쳐 다녔다.

일본 역사이래 최초의 국가의 모습을 갖춘 '에도시대' 이전까지 그랬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과 가족을 지켜줄 수 있는것은 밭(田)이나 논(畓)이 아니었다. 이렇게 떠돌이 인생에 있어서 '숟가락'이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으며 버리고 싶은 물건이었다.

금각사 ⓒ 이정근



일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어느 노(老)병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낙동강까지 밀리던 우리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서자, 공산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패주하는 공산군을 뒤쫓아 진격하다 보니 보급선(線)이 길어져 탄약과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산군의 역습을 받아 양구, 인제에서 3일을 굶은 상태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후퇴하던 공산군 역시 식량도 떨어지고 탄약도 떨어진 상태였다. 이때의 전투 상황이란 적과의 전투가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허기에 지쳐 '숟가락'과 철모는 버린지 오래이고 군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총도 버렸으며,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수통(물통)도 버렸고, 허리띠 금속'버클'마져 무겁게 느껴져 버리고 싶었다. 삶과 죽음이 순식간에 갈리는 전투 상황에서도 제 한 몸 이외에는 모두가 거추장스럽고 무겁게 느껴졌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이러할진데 생(生)과 사(死)를 칼 한 자루에 의지한 채 섬나라를 떠돌아야하는 일본인들에게 '숟가락'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떠돌이 일본인들에게 먹을 땐 젓가락이면 족했다. 젓가락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아무데서나 나뭇가지면 해결됐다.

이게 바로 벼농사를 북방 한계선까지 끌어올려 기마 민족에서 농경으로서의 붙밖이 문화를 창조한 우리 민족과 일본 민족의 차이다. 붙밖이 문화에는 '숟가락'은 물론 식기와 항아리가 필요했다. 항아리가 등장하면서 한국적인 발효식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야만적이고 비 문화적으로 살아온 일본인들에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 우리 민족이었다. 글(漢字)을 가르쳐주고, 종교(佛敎)를 가르쳐준 것이 백제인(百濟人)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쿠다라'(百濟)라는 말은 신(神)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백제는 풍요와 형통의 거룩함이었으며 경배의 대상이었다. 통신사가 왕래하던 조선 중기까지 일본은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함을 드러내는 일본의 습성에 따라 우리가 약했을 때 군림하려 든다. 분단의 아픔에 신음하고있는 이때, 고구려는 중국 땅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변국들이 짖어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통일되고 힘을 길렀을 때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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