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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늘어진 머리는 오히려 세상 살기가 편한가 보다. 온갖 색깔에 마비되고 귀를 덮는 이방인들의 거드름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는가 보다. 그런데, 왜 이리 목이 어색한걸까. 만성적인 두통은 또 왜 오는가. 하루하루는 여전히 시뻘건 고개를 내미는데 답답한 몸뚱이는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을 타고 한강을 건넌다.
언제부턴가 사진 찍히는 것이 어색하고 아니 두려웠다. 그래, 요리조리 렌즈의 사정권을 벗어나며 안도하는 나날들이 늘어만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슨 철만 되면 마치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처럼 교수대 의자 밑에서 아주 경직된 표정으로 영혼을 헐값에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도매금으로 팔려 여기저기 고개를 기웃기웃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모습들도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시계추의 생활과 거대한 톱니바퀴의 개미로 사노라면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 하는 자위를 해 본다. 그러나 문득 문득 찌르는 이 두통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국내최초 한, 중, 일 초상화 대전인 “위대한 얼굴”이 덕수궁 옆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선 발걸음은 어쩌면 이 두통의 실체를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대도시의 소란함을 뒤로 하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들어가는 가로수는 스산한 나목이다. 아무 미동도 아무 표정도 없이 도열하고 있는 한겨울의 전경들이다.
1층은 중국 초상화가, 2층에는 한국과 일본의 초상화 등이 전시되고 있다. 국내최초 한, 중, 일 초상화 대전이라는 타이틀에 무색하게 실망감이 앞선다. 이는 아마 ‘국내 소장’ 한, 중, 일 초상화 소전이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중국 초상화도 명, 청대의 작품만이 일부 전시되고 있는 조촐한 시도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낡은(?) 의복과 세트 재현 등은 흥미를 유발하기 충분했으나 이 또한 장소의 협소 때문인지 여기 저기 분산되어 혼란만 가중시킨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초보자들인 점을 감안할 때 설명 등이 너무 소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의 여지도 있을 듯싶다. 하여튼, 그나마 한자리에서 이렇게 동양 삼국의 진본(?) 얼굴들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은 큰 행운이 아닌가.
먼저 중국 초상화를 보면 조상숭배를 위한 초상인 조종화와 다세대 조상의 초상인 선세초상 등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자세도 얼굴 표정도 특징이 없고 경직되고 경건한 분위기가 압도했다. 대충 특징을 요약해 보면 인물들은 대체로 특권층이고 남자들이 주류며 나이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이한 건 남자들이 하나같이 손톱이 길다는 점이다. 이는 유교의 소산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팔자 좋은 사람들이니 어디 손 하나 까닥했겠는가. 또한 동양 초상화의 전반적인 특징이지만 손을 지독히도 못 그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 당장 왼손으로 그려도 저 정도보다는 나은 성 싶다. 의상이나 기타 배경 소품 등은 정말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 중 호피를 두른 의자는 개중 압권이라 할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아주 재미있는 건 몇 작품 중에서 인물들이 술에 취한 듯한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는 점이다. 여문안 초상을 보니 정말 술 좀 한 모양이다. 코와 뺨이 발그레하고 눈도 풀려있는 모습이란 정말 웃긴다. 전반적으로 딱딱한 분위기인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은 몸소 실소로 낮추며 한결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찌 그런 의상 등을 입었을까 싶다. 특히 여인들의 흡사 고문 틀과 같았을 전족과 화려하지만 목을 꽉 조르는 치파오는 정말 미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러나 팔자 좋은 사람들의 무표정한 자기과시에 전체적으로 따분하다는 느낌은 지을 수 없다.
김시습 - 박주택
금오산 갈 때
중중한 손으로 내 뺨을 후려쳐
나를 남자로 만든 쇠심줄, 아버지
뼈를 깎어 검(劍)을 만들다
살을 찢어 초적(草笛)을 만들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폭포수 속
검(劍)빛 인광을 뿜으며 솔 향
입을 여시니, 태백의 심줄을 보라 하심이렷다
강남역 뉴욕제과 앞
장미꽃을 든 여릿한 남자애 귀고리가 가상타
불알 없는 놈 !
사실 한국 초상화를 보고 싶었다. 아니 정말은 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일면이 바로 윤두서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래 그 진본을 보고픈 마음에 한걸음으로 달려 온 게 아닌가. 언제 또 다시 같은 테두리의 공간에서 볼 수 있겠는가. 물론 박제된 유리창 속으로 희미하게 보인다고 한들 또 어떤가. 보안상 전시의 중요성 때문에 한국 초상화 전시실 입구에 위치하여 소란하고 산만하다고 한들 또 어떤가. 보고 또 보고, 30여분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공재 선생의 진정한 마음과 무엇이 얼굴인지를 읽고 싶었다. 보면 볼수록 꿈틀되는 수염뿌리는 담쟁이 넝쿨이 되어 발가락 끝에서부터 머리털 끝까지 타고 올라와 전율이 된다.
동양 초상화는 ‘털 끝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정신이 있다. 허나 그 외면만을 본 것은 결코 아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내면적 표상으로 일찍부터 관상학이 발달한 점으로 봐서 점 하나 굴곡 하나에도 신경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화면의 창은 몬드리안처럼 슬픈 모가지를 하고 있다. 그 창속에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듯한 하지만 이웃집 아저씨 같은 넉넉한 인품을 가진 한 사내가 있다. 탕건은 과감히 절반을 자르고 청풍명월의 몸뚱이는 무한한 여백 속에 살포시 숨긴다. 다부진 이마, 치켜 올린 눈썹과 눈초리는 화면 넘어 그 누구를 향해 뚫어져라 응시하는가. 눈 주위의 핏기 어린 안경테 자국엔 지난날들의 밤낮이 투영되고 살짝 튀어 나온 코털 몇 가닥은 선인의 풍모를 자아낸다. 아마 만일 수염이 없었다면 쌍꺼풀에 통통한 볼 살집으로 섬세하고 연약한 예술가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저 봐라. 어디 콧수염이 저리도 강단이 있던가. 산줄기의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은 모양새는 숨겨져 있는 공재의 야망이런가. 구레나릇 수염의 하늘로의 꿈틀거림은 인사이드에로의 일말의 욕망은 아닐까. 하지만, 저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처럼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턱수염은 재야의 진정한 고수답다. 그리고 몸통 부분은 눈 먼 후손들의 탐심으로 지워졌다지만 어찌하여 공재 선생은 반 고호가 되셨는가. 뭐 그리 듣기 싫은 소리들이 많았다고 저리도 깊은 침묵을 선택하셨는가. 하기사 작금에도 그럴진대 그럴 만도 했겠지. 하지만, 공재 선생의 속 깊은 목소리가 가슴을 꽝꽝 두드리는 것 같다.
그러나 노년기 조선의 얼굴은 많이도 일그러져 있구나. 고종과 순종의 어진에는 강단 있는 수염도 그 형형하던 눈매도 없다. 이빨 빠진 육신 하나 근근이 건사하려고 그 많은 백성들의 피눈물을 짜내야 했더냐. 단발하고 양장한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오래 갈까. 그리고 차라리 가을의 황엽(黃葉)은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한다. 시절의 청송(靑松)들이 새로운 싹을 띄워 새로운 수풀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무는 조만간 속절없이 쓰러지고 또한 쓸모없는 천덕구니가 되기 십상이다. 그뿐인가. 그 나무만 쳐다보고 있는 풀들은 이리저리 짓밟히고 정처 없는 보트피플이 되는 것이 역사다. 모래성의 황엽들이여. 가을이다. 낙엽 지는 가을이다.
예전 서라벌에 메두사가 살고 있었다. 각기 다른 얼굴을 한 신라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갓 태어난 모례의 뱀도 발끝을 물고 차츰 독성이 온몸으로 번져 오르고 있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여린 얼굴을 한 페르세우스 이차돈은 메두사를 베어 오겠노라고 장담한다. 이에 법흥왕은 ‘너도 독에 감염되지 않았느냐.’라며 제지한다. 그러나 이차돈은 ‘때론 독도 약입니다. 제가 메두사의 목을 자를 수 있는 유일한 칼도 바로 그 독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목을 내놓아 하얀 비의 칼로 메두사를 자른다. 그리고 신라는 싱싱한 새로운 얼굴을 입고 천년왕국의 기틀을 세운다.
또 예전 폭풍우가 정신없이 몰아치던 장안의 숲 속에 뿌리 깊은 최익현 이라는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그는 모름지기 나무를 베려면 먼저 나무에게 정중히 절을 해야 하고 이어 ‘나무님, 도끼 들어갑니다.’라고 고함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손수 다섯 개의 나무를 베어낸다. 하지만 이미 폭풍우로 여기저기 나무들이 넘어간 상황에서 지나친 체면은 가식이 아니냐며 새로운 잔뿌리를 입은 나무꾼들은 묵살한다. 이에 “내 목을 자를 수 있을지언정 이 머리는 자르지 못한다!”는 도끼로 ‘그래, 뿌리 깊은 소나무 뿌리를 몽땅 뽑아내버리고 보기 좋은 얕은 뿌리의 관목들을 심는다면 어찌 숲이 지탱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폭풍우는 때가 되면 거치는 법.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절대 뿌리는 팔지 마라.’라고 말하며 당당히 굶어 죽었다.
얼굴이 많은 요즘, 뿌리 없이 표류하는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누가 이차돈처럼 제 자신의 얼굴을 버리고 진정한 얼굴을 찾을 수 있는가. 또한 그 누가 최익현처럼 제 뿌리를 끝까지 움켜쥐고 폭풍우의 유혹에서 배고플 수 있는가. 그래, 만성적인 두통은 뿌리 없는 메두사의 얼굴 때문이었다. 가슴 속에 위대한 얼굴 하나를 그리고 돌아오는 길, 덕수궁은 ‘니 머리는 잘 붙어 있느냐’ 며 싸늘한 뒷덜미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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