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립민속박물관 ⓒ 정재학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쁜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이 한없이 우울하다 해도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다.
- 천양자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의 中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일까. 오늘의 어제와 내일에 치여 진정한 오늘은 실종된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매일 같은 오늘을 살고 있지만 그 무게 저울은 각기 다른 것 같다. 어제의 낙엽에 매몰되어 오늘의 새순을 틔워야 하는 걸 잊고 있지는 않은지, 내일의 헛된 꽃망울의 망상에 사로잡혀 오늘의 나를 지나치게 혹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의 저울을 들여다본다.
지겹게 지긋지긋하게 떠오르는 새해아침이 밝았다. 색다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료하고 민민한 떡국 살에 세월이라는 나이테는 또 하나의 주름을 새긴다. 그런데, 도대체 새해는 언제 시작되는 거야.
▲ ▲ 12지신상 ⓒ 정재학
지구의 외로운 맴돌기(태양력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바퀴 도는 365 1/4일을 기준으로 하는 달력)는 1월1일이니 이미 지나갔고, 태양의 씨앗을 받은 달의 잉태(태음력) 또한 1월22일(설)이니 이미 지나갔는데, 원숭이해라는 갑신(甲申)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본격적인 원숭이의 기운은 입춘, 즉 2월4일부터 시작된다. 이는 태양길(황도란 지구에서 보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운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天球상의 大圓 궤도)의 초입이기 때문인데, 즉 지구 표면에 직접 닿은 태양의 은혜로운 손길인 것이다.
▲ ▲ 갑신년 잔나비띠 기획전 ⓒ 정재학
그래 만일 사자팔자를 보고자 한다면 입춘이후부터 비로서 甲申年生이 되는 것이다. 이에 입각하면 북반구와 남반구는 다른 결과를 갖게 된다. 아무튼 원숭이의 재롱은 아직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원숭이를 알현하기 위해 국립민속박물관으로 향한다.
지금 국립민속박물관 제2기획전시실에서는 갑신년 ‘잔나비띠’ 기획전이 열린다. 애초 큰 기대를 가지고 간 것은 아니지만 정말 평범하고 너무 평면적인 전시회다. 그러나 제1기획전시실의 ‘산촌’과 설 명절 기획 등은 그나마 볼 만하므로 한번 갈 볼만 하다.
▲ ▲ 잡상, 손행자(孫行者) ⓒ 정재학
먼저 ‘잔나비’는 ‘날쌔다’는 뜻의 옛말 ‘재다’와 원숭이를 뜻하는 옛말인 ‘납’이 하나가 되어 생긴 말이다. 즉, 원숭이의 날쌘 성질에 주목한 것이다. 당시 소의 뒷걸음 같았을 속도감각으로 볼 때 그들의 행동거지는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 적극적이고 재주는 많지만 진득함이 없고 조급하고 차분하게 추진하지는 못한다며 부정적으로 본 것 같다. 하지만 자고나면 세상이 열두번도 더 바뀌기는 현 상황에서 그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측면이 더 많아졌다. 아마 지금의 원숭이는 임기웅변에 응한 팔방미인으로 인기가 좋을 것이다.
▲ ▲ 원숭이탈 ⓒ 정재학
원숭이가 지키는 방향은 西南西이고 시간으로 보면 오후 3시에서 5시까지다. 이는 낮과 밤의 기운이 중첩되는 시간대로 대기가 상당히 불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역대 원숭이가 든 해에는 신라는 남해왕에서 유리왕으로(24년), 백제는 근구수왕에서 침류왕으로(384년), 고구려는 소수림왕에서 고국양왕으로(384년), 후기신라는 경명왕에서 경애왕으로(924년), 고려는 충혜왕에서 충목왕으로(1344년), 조선은 개성에서 한양으로(1404년) 바뀌는 재주를 부렸다.
하지만, 뭐라 해도 갑신년하면 갑신정변이 떠오를 정도로 갑신년은 정변의 기운이 감돈다. 그리고 4월 총선을 겨냥한 120년 갑신년이라며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기 바쁘다.
▲ ▲ 원숭이 신장 ⓒ 정재학
그렇다면, 갑신정변은 어떠했는가. 급진개혁파인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하며 서구문명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민씨 세력과의 갈등, 친청수구파들의 득세, 차관 도입 등의 실패로 입지가 극도로 악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래 예기된 3일천하로 그들의 야망은 결국 공염불이 되었다.
다시 갑신을 보자. 甲은 나무로 높이 뻗으려고만 하는 데 반해 申은 도끼로 나무를 자르려고 한다. 이들은 서로 극도로 대립하며 혼란을 야기 시키지만 결국은 도끼가 승리를 할 것이다. 조선의 훈고파와 사림파의 대립에서 결국 사림파가 승리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원숭이의 성격처럼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재다능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하지 않았는가. 木과 金의 협곡에서 水의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 ▲ 단장(斷腸) ⓒ 정재학
단장(斷腸). 중국 남북조시대 진(晉)나라의 장수 환온(桓溫)이 초(楚)를 치기 위해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을 통과할 때였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하나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다.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는 강가의 험난한 벼랑에도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쫒아왔다. 배는 백 리를 나아간 뒤 강기슭에 닿았다. 어미 원숭이는 서슴없이 배에 뛰어올랐으나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우리에게 개혁은 필연이다. 일본은 독도를 중국은 고구려를 통째로 먹으려고 한다. 또한 미국은 덕수궁과 전쟁의 이득을 러시아는 부동항과 무역의 실리를 위해 군침을 흘리고 있다. 또 다시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그들의 이권침투(利權浸透)에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참고라도 새끼 원숭이를 구하고자 쫒아가는 어미 원숭이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변해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한 눈 팔 여유가 없다.
▲ ▲ 조삼모사(朝三暮四) ⓒ 정재학
조삼모사(朝三暮四).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숭이를 사랑하여 원숭이를 기르다보니 무리를 이루었다. 그는 원숭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원숭이도 역시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집안 식구들의 음식을 줄이면서 원숭이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가 얼마 못가서 궁핍하게 되었다. 원숭이들의 먹이를 제한하고자 하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주는 밥을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로 정하면 족하겠느냐?” 여러 원숭이들은 모두 일어나서 성을 내었다. 조금 있다가 말하였다. “너희들에게 주는 밥을 아침엔 네 개, 저녁엔 세 개로 정하면 족하겠느냐?” 여러 원숭이들은 모두 엎드려 기뻐하였다.
이는 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농락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국회의원들은 조삼모사하지 않았는가. 선거철만 되면 머리를 조아려 표심을 얻고자 갖은 아양을 부리다가 당선되면 주인으로 군림하면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지 않았는가 말이다. 또 다시 원숭이가 되어 속지 않도록 올 해에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
▲ ▲ 농후개자 ⓒ 정재학
거지와 원숭이(弄猴丐者). 원숭이를 놀려 저자에서 걸식하는 거지가 있었다. 그는 원숭이를 매우 사랑하여 한 번도 채찍을 든 적이 없었다. 저물어 돌아갈 때에는 언제나 원숭이를 어깨에 얹어 갔다. 거지가 병들어 죽게 되자 원숭이는 눈물을 흘리며 병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거지가 굶어 죽어서 화장을 하는데 원숭이는 사람들을 보고 우는 시늉을 하며 절을 굽신굽신하며 돈을 빌었고 사람들도 모두 불쌍히 여겼다. 장작불이 빨갛게 타올라 거지의 시신이 반쯤 탔을 때 원숭이는 길게 슬픈 소리를 지르더니 그만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공직자들은 이제부터라도 이와 같은 원숭이가 되라. 자신의 배만 불릴 생각 말고 경제침체로 이래저래 거지가 되어 배고프고 떠도는 국민들을 위해 그 유능한 재주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써 보라.
햇살에게 - 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을 잃어버렸던 지난날들은 이제 추억이라는 낙엽으로 겨울잠을 잔다. 그리고 미래의 오늘은 아직 살얼음판이다. 그 사이로 졸졸대고 흐르는 은혜로운 오늘의 진달래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자. 때론 소걸음처럼 뒷짐을 지고 때론 원숭이처럼 총알을 타며 가지 많은 나무, 도끼로 똑똑 쳐 다듬으면서 뿌리 깊은 나무가 되자. 올 한해에는 오늘의 오늘 속에 푹 빠져 가난하지만 풍만한 오늘의 봄을 만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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