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이승연씨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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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윤(dywoo)등록 2004.02.13 17:57
10여년쯤 전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 대형 백화점이 새로 문을 열었지요. 백화점에선 당시 최고의 연예인들을 불러 열흘 동안‘축제’를 벌였습니다.

당시 고3이었던 저는 여름 보충수업을‘땡땡이’ 치고 구경을 갔지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학교에서는 학생부 선생님들을 백화점으로 급파해 저희를 잡으러 다니셨고, 저희는 용케 도망다니면서 연예인들을 보며 축제를 즐겼지요.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씨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고, 지금은 활동이 뜸한 탤런트겸 가수 황치훈씨의 노래도 들을 수 있었지요. 그리스 조각이라는 별명의 화장품 모델 윤정씨와 악수를 나눌 수 있었고, 특히 당대 최고의 미녀였던 황신혜씨는 바로 앞에서 사인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로서는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이었지요.

바로 그때 이승연씨를 처음 봤습니다. 미스코리아에 입상하고 모 화장품 회사의 모델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였죠. 이승연씨가 제게 해줬던 사인이 기억납니다. 다른 연예인들은 멋들어진 필체로 이름인지, 그림인지 모를 사인을 해줬는데 이승연씨의 사인은 그냥 이름 석자였습니다.

학교에서 공책에 필기하듯이,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 용지에 이름을 적듯이 아무런 기교도 멋도 없는 그저 이름 석자 뿐이었습니다. 모르지요, 그것이 이승연씨의 독특한 사인이었는지도. 최근에 그의 사인을 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이승연씨가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그때 보았던 기라성 같은 스타들과는 달리 몹시도 수줍어 하는 표정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스타들은 사인을 해주며 여유있게 인사도 하고, 농담도 하고, 사진 촬영에도 자연스럽게 응해 줬는데, 이승연씨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말도 한마디 안하고 그저 수줍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습니다. 참 예뻤습니다.

저는 ‘이제 연예계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부끄러워서 저러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 이후로 전 이승연씨의 팬 아닌 팬이 되었습니다. 팬이라고 해봐야 특별히 좋아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연예인들보다 한번 더 눈길이 가고, 스포츠 신문에 이름이 나오면 조금 더 기사를 꼼꼼히 읽는 정도의 수준이었지요.

몇 년 전 이승연씨가 불법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이 들통나 사회봉사활동 명령을 받고, 몸이 불편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의 몸을 씻겨주고 있는 사진을 봤을 때도 남들처럼 그리 욕하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이 도덕적인 불감증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바빴으면 저랬을까. 이번에 크게 뉘우쳤을 테니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이승연씨가 얼마 전에 누드를 찍었다네요. 그것도 종군위안부를 주제로 말입니다. 각 언론사의 웹사이트에서 이승연씨의 기자회견을 다룬 기사를 읽고는 잠시 멍해졌습니다.

이승연씨와 기획사라는 곳에서 내세우는 논리라는 것이 참 기가 막히더군요. 다들 알고 계실테니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굳이 역사의식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건강한 상식’ 차원에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이승연씨 누드파동이 한 명의 생각없는 연예인과 장삿속으로 똘똘 뭉친 기획사에서 벌인 해프닝 정도로 끝날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한번 이미지를 구긴 이승연씨는 도저히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르지요.

이승연씨 누드파동을 보며 전 개인적으로 10여년 전 수줍은 표정의 그녀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연예계 새내기로 첫발을 내디딘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는 얼마나 많은 희망과 포부와 꿈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결코 녹록치 않은 연예계 생활에서 실패하고, 좌절하며 그렇게 물들어 가는 동안 그녀는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에 괴로워 했을까요. 그런 고민과 갈등이 그녀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급기야는 이번처럼 어이없는 결단을 내리고 말았겠지요.

인기가 떨어진다 싶으면 무작정 벗어대는 다른 연예인들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한 것까지는 이승연씨 개인의 의사이니 가타부타 할 게 아니라지만,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은 도저히 지울 수가 없네요.

이승연씨는 너무나 엄청난 일을 벌이고야 말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 같네요.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이 무서운 말처럼, 10여년 전 제가 봤던 이승연씨의 수줍고 예뻤던 표정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괜시리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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