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경부는 외환시장의 '늑대소년'인가
1. 문제인식의 틀 : 시장개입의 유효성에 관한 논의
2. 글로벌 개방시대에 물량개입식 '관치'는 필패
3.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다
4. 환율정책의 이론적 틀 : 시장개입의 불태화를 둘러싼 논의
5. 재경부식 '연목구어'(緣木求魚)인가
6. 공허한 논의는 금물
7. 고용확대와 환율방어, 대내외 동시균형을 위하여
8. 마치 '기시체험'(deja vu)인 듯 하다
지난 수개월간 재경부가 직접 나서서 '환율 떠받치기'에 진력하던 모습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생각나게 한다. 작년 상반기 중 평균 1,200원대를 웃돌던 원/달러 환율은 하반기 들어 완만한 하락세를 보였으나, 아시아 각국의 유연한 환율정책을 촉구한 9월20일의 G7(선진7개국) 재무장관회담 이후 1,150원대(10월10일 최저치 1,147원)로 폭락하였다. 재경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강력한 시장개입에 나섰고 이에 힘입어 11월 하순 이후로는 다시 1,200원 내외로 올라설 수 있었으나, 금년 들어 다시 하락세로 반전하여 1월중 1,170원대, 2월 들어 1,160원대를 거쳐 16일 현재 1,157원으로 힘없이 무너지며 가파른 하락세를 지속하는 중이다.
( 문제 인식의 틀 : 시장개입의 유효성에 관한 논의 )
시시각각 관찰되는 '시장환율'과 정책당국이 의도하는 '목표환율'간의 괴리 문제이며, 거의 모든 경제문제가 그러하듯이 시장환율의 배후에 '균형환율'의 존재가 숨어있다. 논의의 편의상, 이들 개념을 중심으로 지난 이십여년간 국제경제학자들이 외환시장 개입의 유효성 내지 안정성을 둘러싸고 전개했던 주장들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외환시장 개입이 유효할지의 여부는 외환당국에 대한 시장참가자의 신인도(credibility)에 의존한다. 시장이 외환당국을 신뢰하면 당국의 시장개입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여 시장환율을 당국이 의도하는 목표환율 범위내로 안정화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당국이 실제로 개입하기 이전이라도 개입하려는 의사만 사전에 인지되면 시장은 미리 알아서 시장환율을 당국의 목표환율 범위내에 스스로 안정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른바 '밀월 효과'(honeymoon effect)이다.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시장환율이 시장의 수급에 의해 결정되는 균형환율에서 벗어나 있으나 조만간 균형환율로 복귀할 것이라는 당국의 판단에 시장이 동의하는 경우이다. 또는 당국의 유효한 시장개입에 의해 새로운 균형환율이 조만간 당국이 의도하는 목표환율 범위내로 조정될 수 있다는 당국의 의지 및 능력에 대한 믿음을 시장이 가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시장의 신인도가 불충분하면 외환당국과 시장간의 밀월관계는 해소되고 그 대신 사사건건 맞서게 되는 이혼상태(divorce)로 뒤바뀐다. 외환당국이 시장환율의 하락을 막기 위하여 달러화 매입에 나서게 되면, 시장참가자들은 이에 대해 달러화 매도로 맞서는 외길 선택(one-way option)으로 나아간다. 당국이 더욱 강경한 자세로 무제한 달러화를 매입하겠다고 선언하면 시장참가자들은 이를 당국의 '허세'(bluffing)로 간주하고 장래의 가치하락이 확실하다고 믿는 달러화를 지금 당장 매도하겠다고 집단으로 나선다. 당국은 이를 투기적 집단행위(herding behavior)라고 비난하나, 시장의 관점에서는 '늑대소년'에 대한 합당한 징벌이다. 사실 당국의 시장개입이란 시장전체의 거래량에 비해서는 매우 작은 일부분이며 조만간 당국은 시장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당초 의도했던 목표환율의 변경이나 포기가 불가피하며 이것이 크든 작든 통화위기로 가는 길이다.
( 글로벌 개방시대에 물량개입식 '관치'는 필패 )
작년 9월 이후 재경부가 보여준 시장개입의 실상은 외환시장의 매도잔량을 대부분 사들여서 시장환율을 가급적 1,200원대의 목표환율 가까이에 붙들어 매는 것으로, 개입물량만 확보될 수 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재경부는 작년 중 12조 8,000억원의 외평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를 발행하였고 이를 통해 조달된 원화자금으로 100억달러 이상의 미달러화를 매입하였다. 이에 더하여 외환시장에서 사들인 달러화를 국책은행 등과의 스왑계약을 통해 매각, 추가로 원화자금을 조달함으로써 미달러화를 외평채 발행금액 이상으로 사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하였다. 그 결과 작년 10월중 70억달러의 외환보유고가 늘어나는 등 외환보유고가 8월말 1,362억달러에서 12월말 1,554억달러로 네 달만에 200억달러 가까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시장의 일방 매도와 재경부의 일방 매수가 맞서는 대결상태가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다. 재경부의 시장개입 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이를 호기로 삼는 투기적 매도세력만 더욱 몰려든다. 해외자금이 국내주식시장 등에서 안정적인 투자를 하려면 국내외환시장에서 달러화를 매도(원화투자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역외선물환(NDF)시장에서는 통상 환위험 회피를 위해 선물환을 매입하게 되는데, 작년 4/4분기 이후로는 양 시장에서 달러화 및 선물환의 동시 매도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투기세력의 실체에 대한 뚜렷한 증거이다. 재경부가 국내외환시장에 개입할 물량을 더 이상 동원하기 어려워지면서, 원금교환 없이 차액만 결제하는 NDF시장에 직접 나서서 이들 투기세력 등의 선물환 매도잔량을 사들여 보나 이마저도 이미 만기물량(누적 매수초과포지션)이 150억달러에 달하는 실정이다. 지난 1월 14일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투자자들에게 배포한 보고서에는 '한국경제의 전망이 상당히 긍정적'이며 원화가 매우 좋은 투자대상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환투기세력에 대해 투기적인 매도를 적극 촉구한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은 국제자본이 광속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개방경제시대이다. 물량에만 의존하는 구시대적 '관치'로는 시장에 감히 맞서봐야 필패하기 마련이다. 금년 들어 NDF시장에서도 투기세력에 밀리면서 이제는 하루하루 롤오버 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더 이상은 투기세력의 선물환 매도물량을 받아줄 여력이 없게 되자, 재경부는 드디어 국내금융회사의 NDF거래 자체를 제한하게 된다. 지난 1월 16일 금융회사의 비거주자에 대한 NDF 매입초과포지션을 1백10%(1월14일 기준) 이내로 제한하였고, 이에 이어 비거주자에 대한 NDF포지션이 매도초과였던 금융회사는 매도초과상태를 90%(1월16일 기준) 이상 유지하도록 하였다. 국내외환시장 및 역외NDF시장에서 더 이상의 물량개입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어쩔수 없이 내려진 재경부의 고육지책이다. 마침내 지난 1월 30일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환율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도록 한다'는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 경제에 '공짜점심'은 없다 )
재경부는 내수부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우리경제의 마지막 버팀목인 수출을 떠받치기 위하여 환율을 일정수준 이상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한 외환시장 개입은 그간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매월 두 자리 수의 증가율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고의 호조를 보인 수출만을 놓고 보면 분명히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다. 막대한 규모의 외평채 발행 등에 기인하여 시장금리가 상승하고 민간여신이 감축된 결과 투자부진 및 소비침체 등 내수위축(crowding out)이 불가피하였다. 그간의 외환시장 개입방식은 전자 및 IT 등 대기업 위주 수출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중소제조업, 서비스업 등 내수기업들과 자영업자들을 희생시킨 것에 불과하며, 작년말 발표한 KDI 보고서에서도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이 수출과 내수간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짜 점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바가지'(rip-off)를 쓴 셈이다. 시장개입 자체에 따르는 비용만 해도 연간 수조원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원화표시 외평채는 국고채수익률에 0.2%p의 가산금리를 더한 수준에서 발행되는데 한은에서 받게되는 외환보유고 운용수익율은 이보다 크게 낮아 막대한 역마진이 발생하고, 하락추세인 환율로 인해 그간 매입한 달러화 및 선물환에 대한 환차손 부담이 엄청나며, 이에 비하면 약소한 금액이지만 스왑 및 NDF매입 수수료 등까지 꼬박 물어야 한다. 이미 2002년 중에도 외평기금은 국내외금리차가 확대되고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서 1조 8천억원의 당기순손실을 초래한 바 있다. 국내외 투기세력이 국내외환시장 및 역외NDF시장에서 달러화 및 선물환을 마음놓고 매도할 수 있게 재경부가 이들 물량의 대부분을 받아주었던 현실을 감안하면 그간의 시장개입비용은 투기세력에 대한 일종의 지원비용이기도 하다.
그간 우리경제의 어두운 그늘을 가리면서 실제로는 문제를 키워온 것은 아닐까. 지금대로라면 앞으로 예상되는 환율하락 과정에서 우리경제의 실물 및 금융부문이 부담해야 할 조정비용은 엄청나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 하반기 이후 급증했던 수출증가세가 금년 들어서는 자동차 등 일부 업종의 수출 둔화세를 시작으로 점차 약화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성전자 윤종용 회장은 2월 12일자 한겨레신문 기고에서 '지금 세계각국은 저마다 상대국 통화의 강세를 요구하는 한편 자국통화는 시장개입 등을 통해 약세기조를 유지'하고자 한다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환율방어정책이 '정당하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개입방식이 벽에 부닥친 상황에서 향후 어떻게 환율방어를 해나가느냐의 문제이다.
금융시장에서는 지금의 환율하락 추세가 가속화되면 어느 시점(예: 1,100원 수준)에서는 그간 유입된 투기성 외국인주식투자자금 등이 환차익 실현을 위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원화가치가 급락(환율이 급등)하고 주가 및 채권가격도 동반 급락하는 이른바 '트리플' 약세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는 중이다. 작년 하반기 이후 경기상황과는 상관없이 투기적인 외국인주식투자자금 등이 대량 유입되었고, 지난 1월 NDF거래에 대한 규제 이후로는 하루에 20억 달러 내외의 투기성 해외자금이 최근 주식시장으로 물밀 듯 밀려오면서 주가는 현재 900선 '버블'을 향해 연일 접근하고 있다.
( 환율정책의 이론적 틀 : 시장개입의 불태화를 둘러싼 논의 )
국제경제학의 교과서적 이론을 빌려보기로 한다. '크루그만'과 '옵스펠드'의 공저 '국제경제 : 이론과 정책'에 의하면 개방경제의 표준적인 모델을 사용한 분석에서는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이 있더라도 '화폐공급이 변하지 않는 한 (균형)환율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장에서 달러화와 원화의 상대비율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이른바 '불태화 개입'의 경우에는 균형환율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명확히 정의하면, 외환당국이 달러화를 매입(매도)하는 대가로 원화를 지급(수취)한 후 이를 방치하지 않고 통안증권 매각(매입) 등에 의해 원화를 환수(공급)하여 화폐공급의 증가(감소)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 '불태화' 개입(sterilized intervention)이다. 반면, 이를 방치하여 화폐공급의 증가(감소)를 용인하는 것이 '비불태화' 개입(non-sterilized intervention)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소국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의 경우 불태화 개입의 유효성을 확보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개방거시경제의 단기균형(IS/LM)분석에 의하면 '국내시장금리'는 실질금리이건(M/F model) 아니면 명목금리이건(Dornbusch model) 간에 국제시장금리에 의해 결정되는 외생변수에 불과하다. 정책변수인 화폐공급에 의해서 내생변수인 실물부문의 국민소득과 금융부문의 환율이 동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균형환율은 항상 통화공급에 의존하며, 통화정책으로부터 독립된 환율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책당국이 목표환율의 범위를 설정한다는 것은 통화공급의 범위를 책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예를 들면 균형환율의 상승(시장환율의 하락방지)은 불태화 개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화확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요컨대, 불태화 개입의 이론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국내자산과 해외자산이 '불완전 대체재'인 경우 불태화 개입이 다소간 유효해질 수 있는 여지는 있다. (portfolio balance effect) 그러나 다수의 실증연구결과는 이 경우에도 불태화 개입이 일시적으로 '시장환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균형환율'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만약 외환당국이 정교한 불태화 개입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이에 의해 시장환율이 균형환율로 회귀하는 과정을 안정적으로 조정관리(smoothing operation)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또 다른 경우는 외환당국을 신뢰하는 시장참가자들이 불태화 개입을 조만간 통화정책이 변경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미리 반응한다는 가설이다. (signalling effect) 외환당국이 원화를 대가로 달러화를 매입하면 시장참가자들은 조만간 통화 확대(원화가치 하락 = 달러화가치 상승, 즉 환율상승)를 예상하여 달러화 매도를 자제하게 되고 이에 따라 '균형환율'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일부 실증연구결과가 보여주듯이 불태화 개입이 현실적으로 균형환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신호 효과'가 작동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조만간 상응하는 통화정책상의 조정이 실제로 취해지지 않는다면 시장이 자신의 잘못된 기대를 수정하면서 균형환율에 미쳤던 효과는 즉시 사라지고 시장의 외환당국에 대한 신인도만 그만큼 저하하게 된다.
( 재경부식 '연목구어'인가 )
재경부가 그간의 시장개입에서 논거로 삼았던 원화 및 엔화간 '디커플링'(decoupling)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경제는 호전되고 있으나 한국경제는 침체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양국간 물가상황도 크게 다르기 때문에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의 하락 정도가 엔화 환율보다 작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실적으로도 우리경제의 주요 수출품목이 일본과 경쟁하는 현실에서 원/달러 환율 자체의 변화보다 원/엔 환율의 변화가 대일본 수출은 물론 세계수출시장에서 우리 수출의 대일 가격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수개월간의 시장개입 결과 원화와 엔화간 환율은 종전의 10 대 1 수준에서 11 대 1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물량개입이 어려워지면서 금년 들어 다시 10 대 1로 점차 환원되는 과정이다.
아직도 관치를 떨치지 못하는 재경부식 '연목구어'인가. 물량에 의존하는 구시대적 시장개입 방식에 의해서는 '시장환율'을 일시적으로(물량이 확보되는 한 그리고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붙들어 맬 수는 있어도 '균형환율 끌어올리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던 일이다. 재경부가 채권시장에서 직접 외평채를 발행하여 원화자금을 조달하고 동 자금을 대가로 미달러화를 매입하는 방식의 개입은 전형적인 불태화 개입으로 균형환율에 대해서는 일시적인 효과조차 미칠 수 없다. 외환시장의 매도잔량을 매일매일 수거해 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투기적 매도세력을 한없이 불러들이는 부작용만 키워나간다.
재경부가 일상적으로 한은의 발권력에 의존하여 수행하는 외환시장 개입의 효과도 균형환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와 같은 소국개방경제에서 통화정책과 환율정책은 전혀 별개가 아니다. 국제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마치 중앙은행이 의도적으로 불태화 정책을 취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그러할 필요는 없다. 중앙은행인 한은이 목표콜금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견지하기만 하면 발권력에 의존하는 개입 효과가 자동적으로 불태화되는 것이다. 최근 수치로 '업데이트'할 필요는 있겠으나, 2003년 7월말 현재로는 경상흑자 및 외국인투자자금 유입 등 해외부문의 본원통화 증가요인이 13조원이었으나 총 17조원의 통안증권(14조원) 및 외평채(3조원)를 발행하여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는 바, 이로 인해 민간여신이 18조원 감축(본원통화 3조원 감축)되어 내수를 심하게 위축시켰고 또한 균형환율의 추가적 하락요인으로 작용하여 통화당국 자신이 투기성 해외자금의 유입요인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요컨대, 재경부의 환율정책이 한은의 통화정책과 분리되어서는 시장의 신인을 확보할 수 없다. 지난 수개월간 재경부가 온갖 방법으로 환율방어에 진력하였으나 한은의 통화정책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이들 시장개입 정책은 시작부터 실패하게 될 운명이었다. 한은이 비록 환율정책에 대한 최종권한을 보유하지 않더라도 재경부의 시장개입을 불태화(무력화)시키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며 재경부의 환율정책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법률적,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함에도 재경부가 자기 손으로 좌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까지 온통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재경부의 목표환율 범위(band)와 한은의 통화정책간의 정합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동 확약'이 필요하며 이를 시장에 공표하여 소기의 정책효과를 거두어야 한다. 재경부와 한은은 각자가 독립된 의사결정기능을 가지고 숙명적으로 견제와 협력을 주고받아야 하나, 명심할 것은 통화정책과 환율정책이라는 불가분의 정책권한을 법률적으로는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각각 독립적으로 나눠 가질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 공허한 논의는 금물 )
환율이 외환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도록 시장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내용을 담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다. 시장주의는, 마치 민주주의가 그 내용은 실제로 채워나가야 하는 정치적 형식이듯, 마찬가지로 인류가 고안해낸 최고의 경제적 형식일 뿐이다. 외환시장의 수급 자체가 구조적으로 왜곡된 경우에는 시장환율이 균형환율보다 높으니까 또는 시장환율이 하락하는 추세이니까 환율하락을 방치해야 한다는 식의 추론은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시장개입이 없는 상태에서 균형환율은 분명히 외환시장의 수급구조에 의해 결정되나, 진정한 시장주의자의 안목으로는 균형환율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작년 중 실제 GDP성장률이 우리경제의 잠재성장률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이 역시 실물경제의 균형상태에서 결정된 산물일 수 있다. 왜곡된 추세 분석은 왜곡된 정책을 양산한다.
지난 수년간 과도한 자본수지 흑자, 특히 포트폴리오투자수지 흑자로 인하여 외환시장의 균형환율은 우리경제의 기초여건과는 괴리된 채 원화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경제학을 빌려 표현하면 외환시장의 수급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균형환율이 부분균형(partial equilibrium)에 불과하고 정책당국이 목표 삼아야 할 적정환율은 결코 아님을 의미한다. 지난 한해 경상수지 흑자와 외국인주식투자자금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화는 230억 달러에 달했고, 이런 종합수지 흑자추세는 금년 들어 폭발적인 투기자금 유입 증가로 더욱 확대되는 중이다. 이로 인한 시장환율의 급락을 방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통화확대(목표콜금리 인하)에 의해 균형환율을 끌어올려 환차익을 노리는 투기성 해외자금의 유입유인을 원초적으로 해소시키고 이미 유입된 투기자금의 환차익 실현기회를 무산시켜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내국인의 해외투자요건 완화 등 자본수츨 증대를 통한 중장기적 외환수급구조 개선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개방경제의 거시경제적 균형에 부합하는 목표환율의 설정 및 관리가 긴요하다. 지난 2월 7일 미국 보카러턴에서 열린 G7 회담이 재차 '환율 유연성이 부족한 지역 및 국가는 유연성을 증대시킬 필요가 있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한 이후 세계 각국의 환율전쟁은 이제 동아시아에 집중되고 있다. 경상수지 측면에서 보면 국제적인 통화절상압력의 강도가 일본, 중국, 한국 등의 순서로 차별화(de-grouping)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은 미국, EU, 중국 등 거의 모든 나라에 대해 엄청난 흑자를 보이는 반면, 중국은 미국, EU에 대해서는 막대한 흑자를 나타내나 한국, 일본 등에 대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적자를 나타낸다. 이에 비해 한국은 중국, 미국 등에 대해서는 흑자국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이를 대부분 상쇄할 정도의 적자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엔/달러 환율은 지금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일본의 다니가키 재무상은 금번 G7 회담에서 '일본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한 참가국의 양해가 있었다'고 은근히 회원국 프레미엄을 과시하고 있다.
( 고용확대와 환율방어, 대내외 동시균형을 위하여 )
결론적으로, 과감한 통화확대(목표콜금리 인하)에 의해 균형환율을 상승시키고 시장금리를 인하시켜야만 수출은 수출대로 지금의 호조세를 유지할 수 있고 내수경기는 더 이상 수출유지의 대가로 희생될 필요 없이 지금의 침체상태를 점차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된다. 개방경제의 대내균형(고용 및 물가안정)과 대외균형(환율)을 조화시키는 '정책조합'(policy mix)의 관점에서도 타당한 정책 선택이다. 물가안정보다 고용증대가 중요한 작금의 디플레 상황에서 통화확대라는 하나의 정책으로 고용안정과 환율안정이라는 대내외 목표의 동시달성이 가능하다. 이들 거시경제 목표들을 둘러싼 통화정책의 '딜레마'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최근의 유류 및 원자재가격 상승 등 공급측면의 물가상승요인에 대해서는 경영합리화나 소득정책 등 공급측면의 대응책이 필요할 경우 강구되어야지 금리인상 등 수요측면의 통화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은 교과서적 이야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통화확대 등에 기인하는 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상승 가능성에 대해서는 보유세 강화, 원가 공개, 거래 투명화 등 미시적인 관점에서 부동산시장의 구조개혁정책으로 그 강도를 조절하여 보완 대응하면 그만일 것이다.
일본의 정책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94년 6월 엔/달러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1백엔 아래로 떨어지는 '슈퍼엔고' 시대가 시작되자 일본정부는 수시로 시장개입에 나섰고 95년 3월 및 4월에는 당시로는 전례가 없었던 매월 250억 달러 이상의 과감한 시장개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일은이 2.2% 내외의 콜금리수준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무제한적인 시장개입의 효력조차 무력화(불태화)될 수 밖에 없었고 95년 3월중에는 환율이 80엔대로 폭락하기까지 하였다. 일은이 95년 4월중 75bp의 대폭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하고서야 끝모를 추락의 기세가 점차 잡히기 시작하였고, 9월중 다시 50bp의 추가적인 금리인하조치를 취하고서야 다시 100엔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 마치 '기시체험'인 듯 하다 )
지난 2월 6일 박승 한은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콜금리를 현행수준(연 3.75%)에서 동결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재의 환율은 시장의 수급균형을 맞춘 상태라고 본다'면서 '더 이상의 환율하락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통화를 확대(목표콜금리를 인하)하지 않는 한 균형환율을 끌어올릴 수가, 시장환율의 하락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 실제로 지난 16일 시장환율은 1150원대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히려 한은은 최근까지 유가 및 국제원자재가격 상승 등 공급측면의 물가상승요인에 대해 통화정책 등 수요측면의 정책대응이 불가함에도 이를 빗대어 목표콜금리 인하의 어려움을 개진하려고 하는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지금 우리경제에 요구되는 선제적인 통화확대는 단행하지 못하면서 궁색한 변명들은 선제적으로 찾아내려는 것인가.
마치 '기시체험'(deja vu)인 듯 하다. 슈퍼엔고가 진행되던 1995년 4월 1일, 일본경제신문에 '자승자박의 일은'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우선 일은의 독립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대장성의 금리인하 요청에 거부반응이 있었다. 또 일은은 경기상황에 대한 판단미스로 인해 전년 말에 오히려 금융긴축을 취하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판단 미스를 인정하는 셈이기에 금융완화로 나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보다 거의 10년 뒤인 금년이나 내년 초쯤 우리나라 경제신문들도 '자승자박의 한은'이라는 제목으로 혹시 유사한 보도를 내보내는 것은 아닌지 지금으로서는 크게 염려되는 바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