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몸에 내 발이 닿았을 때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검토 완료

김용운(ikem)등록 2004.03.11 17:58

영화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그 날 밤, 내 기분이 아마도 그 제자들의 기분과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당신은 내 발을 씻겨준 것이 아니라 손으로 가만히 감아쥐었을 뿐이지만. 당신 손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체온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길처럼 포근했답니다.

그 느낌을 차마 떨치지 못해 가만히 있었지요. 그렇게 당신과 누워 있었던 그 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 있다는 것이 약간 죄스러웠지만, 그것이 정녕 죄라면 죄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따라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남편은 일을 사랑하고 저 역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그것이 가끔은 쿵쿵거린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네요. 아마도 도쿄에서 감염된 일종의 바이러스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그걸 옮겨준 사람은 밥, 당신이겠지요. 치료약이 불분명한 그 바이러스 덕분에 저는 한동안 혹은 한평생 불쑥 불쑥 가슴앓이를 해야할 지도 모르겠군요. 저만 그렇다면 매우 억울해 할 거예요.

단 일주일 동안 마주친 사이일 뿐인데. 그 일주일을 과연 평생 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분명 "잊을 것이 분명해" 라고 답했을 테지요.

우리가 느낀 감정이란 낯선 곳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느낀 정도의 반가움과 야릇한 동지 의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거라면서. 양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내 눈을 보며 말했겠지요. 그 눈빛에 담긴 삶의 깊이를 당신은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 깊이를 과연 내 남편이 가질 수 있을까요? 마냥. 장난꾸러기 같은 사람인데.

참. 손님들이 직접 음식을 요리하도록 먹게 만든 그 이상한 식당. 그 요리의 이름이 '샤브샤브'라고 하더군요. 원래 요리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라고 남편이 알려주었답니다.

남편이 그 요리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미국으로 돌아와서야 알았습니다. 가끔 집에서 남편을 위해 그 요리를 준비하는데, 그것이 정말 남편을 위한 것인지, 제 추억을 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웃곤 하지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약간은 안타깝네요. 위스키 광고는 미국의 잡지에서도 보이던 걸요. 게다가 당신이 은막에서 완전히 은퇴한 것도 아닌 이상. 제가 원하지 않아도 간간이 매스컴을 통해 소식을 듣곤 하겠지요. 반면 제 소식을 당신이 들을 리 만무하겠지요. 이렇게 제가 연락을 드리지 않는 이상은.

분명한 것은 이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사실 편지를 보낼까 말까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만약 당신이 이 편지를 읽게 되거든 잠시나마 저를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가만히 발을 어루만져 주었던 당신의 그 손길 때문에, 가끔 춥지 않은 날에도 발이 시려운 사람이 같은 미국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을.

마주 누워있는 샬롯과 해리스. ⓒ CJ엔터테인먼트

샬롯은 해리스 쪽으로 웅크리고 눕는다. 남녀의 애정이 서로를 알몸으로 만든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주보고 누워있는 해리스의 눈빛은 담백할 뿐. 편한 마음에 그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 보련만. 샬롯은 손을 뻗는 대신 그의 종아리 언저리에 발가락을 살짝 가져다 댄다.

그녀의 얼굴을 멀끔히 바라보고 있는 해리스. 그는 인생선배로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딸처럼 보이는 샬롯의 머리카락이라도 무심코 만져 볼 것 같지만. 그의 손은 자신의 몸에 어느 순간 조심스럽게 닿아있는 그녀의 발을 가만히 어루만질 뿐이었다. 서로의 손과 발을 통해 전해오는 체온을 모르는 척 상대의 눈만 바라보는 샬롯과 해리스. 그 순간 달뜬 남녀의 애욕은 증발하고 이심전심을 나누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 모처럼 만날 수 있었던 담백하고 좋은 영화였다. 일본에 대한 할리우드의 편견이 가득한 영화라고 비판의 여지가 있었지만 내 눈에 보였던 것은 상대를 소유하지 않고서 나누는 교감과 그 주변의 깨끗한 여백이었다.

알콜 가득한 술이나 단맛 범벅인 탄산음료만 마시다 어느 날 새벽. 약수터에 올라 맑은 샘물을 마신 것 같은 기분으로 극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간 한 쪽으로 쏠려있던 정서의 불균형을 바로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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