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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정당의 당원이나 지지자는 그 당의 정강. 정책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그 어떤 당보다 민노당 지지자들이 자주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다.
필자는 민주노동당의 평소 주장에서 1980년대 중반 운동권 정서가 듬뿍 묻어나와 얼마전 www.kdlp.org를 클릭하여 그 강령을 꼼꼼히 살펴 본 적이 있다. 강령은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하여’로 시작되는 전문과 정치,경제,통일,외교,과학기술등 16개 항목으로 나뉘어져 서술되어 있었다.
읽고 난 느낌은 한마디로 당혹과 경악 그 자체였다.
1980년대 중반 전두환의 폭압과 자본의 전제적 지배가 횡행하고, 소련,중국,북한등 사회주의권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제한된 시절 형성된 사고가 그대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멸종된 줄만 알았던 공룡이 살아서 뛰어다니는 것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필자는 민노당 강령이 주는 충격 덕분에 민주당 강령 214개조항,열린우리당100개 조항,한나라당16개조항,민주사회당(녹색사민당)100개 조항을 꼼꼼히 비교하면서 보게되었다. 그런데 민노당 강령은 나머지 강령들과 정말 확연히 달랐다.
민노당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그 당의 ‘영혼’이자, 온갖 공약의 모태가 되는 ‘강령’을 바로 아는 것은 정말로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는 한 소위 보수정당 지지자는 물론이고, 꽤 많은 민노당 지지자조차 자기 당의 강령을 읽어 보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지지도 반대도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자기가 부여한 ‘이미지(대체로 허상이다)’에 입각하여 이뤄진다면, 한국 정치 발전은 요원할 것이다.
민노당 강령이 무엇이 그리 황당했는지, 그 전문부터 살펴보자(이는 그 핵심을 최대한 짧게 요약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외세를 물리치고 반민중적인 정치 권력을 몰아내어 민중이 주인되는 진보정치를 실현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평등과 해방의 새 세상으로 전진해 나갈 것이다.
…미국을 정점으로 한 외세는 한반도를 분할하고 남북간에 전쟁을 부추켜 민족상잔의 참극을 야기시켰으며, 남북 모두에게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민중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주와 자유를 빼앗아 갔다.
…매판적인 개발독재는 이제 외환·금융파탄으로 이어지고 이로부터 불거진 한국경제의 위기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와 정치 권력은 이 위기의 본질은 외면한 채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더욱 가증스럽게 민중을 착취하고 있다…. 독점자본가, 금리 생활자, 투기꾼들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신자유주의는 곧 절대 다수 민중의 권리를 유린하는 야만일 뿐이다….한국의 정치 권력은 국내외 자본의 충실한 대리자에 불과했다. 재벌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한 민중은 정치·경제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다…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신자유주의를 타파하기 위해…투쟁해 나간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한다….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삶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는 공공의 목적에 따라 생산되도록 한다.
요컨대 ‘미국이 대리통치 세력을 내세워 남북간에 민족상잔의 참극을 야기시키고, 남북한에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유도하여 민중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주와 자유를 빼앗아갔다’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반미투쟁과 반민중적.비자주적 정권과의 투쟁을 당면과제로 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민주적 경제체제 수립’으로 요약되는 경제분야 강령에서는 민노당의 지향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이것은 사회적 소유를 바탕으로 하여 시장을 활용하는 경제체제’이다….’민주적 경제체제는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다양한 소유와 시장적 조절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한다.
이러한 민주적 경제체제를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추진한다.
첫째, 재벌을 해체하고 민주적 참여기업을 확산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나 소유 분산이 아니라 사회적·공공적 소유의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 이를 위해서 총수 일족의 지분을 공적 기금을 활용해 강제로 유상 환수하여 재벌을 해체하고, 또 해당 기업의 노동자를 비롯해 다수 국민들이 소유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한다.
재벌 지배 대기업 가운데 공공성이 높은 부문인 통신, 운수, 병원, 학교 등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으로 전환한다.
둘째,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두고 시장을 활용한다.
…외환금융위기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와 조급한 대외개방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는 대책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정책은 대량실업과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공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각종 금융기관을 재벌과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고, 공적 소유와 경영을 기본으로 하되, 경제정책위원회가 통제하는 민주적인 금융감독기구의 감독을 받도록 한다.
셋째, 자주적이고 평등한 대외경제관계를 확립한다.
…국내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의 소유 경영 지배는 국민경제의 중핵이 아닌 부분에서 일부만 허용하고, 잉여를 유출하지 못하도록 경영 내용에 대해서 감독한다.
이쯤되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전략을 추구하던 1950년대 유럽사회당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정책으로만 본다면, 민노당이 가려고 하는 길은 지금 유럽 사회민주당들이나 중국공산당, 베트남공산당등이 가는 방향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자본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생각해 본다면, 민노당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득세하는 것만으로도 해외투자자들은 한국 투자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민노당의 정책이 실제 집행된다면, 아마 한국은 지구상에서 해외자본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하는 나라로 될 것이다.
그외 통일.외교 분야 강령을 간략히 살펴보자.
궁극적인 통일체제는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극복되면서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여야 한다. ….IMF 관리체제 이후 심화된 종속적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통일 배제적 경제구조를 전면 수정하여 …국민경제 구도로 전환해야 한다.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고 자주권을 억압하는 미국을 포함한 모든 외세와의 불평등 조약 및 협정을 무효화하고...불평등한 한미 군사조약과 한미 행정협정을 폐기하고, 핵무기를 완전히 철거하고 미군을 철수시킬 것이다. 어떤 군사적 블록에도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며, 자주적인 비동맹운동을 지지하고 이에 적극 참여할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하고 남북간에 민족상잔의 참극을 야기시키고, 남북 모두에게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유도하여 민중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주와 자유를 빼앗아갔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강령은 미국에 대한 시퍼런 적의를 상당히 많이 순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북한에 대해서는 ‘경직성’을 문제삼고(역으로 좀 유연하면 괜찮다는 얘기라고 볼 수 있다) 남한에 대해서는 ‘천민성’을 문제삼는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적일 뿐 아니라 통일의 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강령전체에서 무려 18번이나 거론되는 신자유주의는 전문은 물론 경제,통일,..교육,노동,환경.,사회복지 강령에서도 주요하게 언급된다.
민노당이 가장 강점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노동 분야 강령은 어떨까?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최소한의 문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생활 임금을 지급하고’ …’자유로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 행동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한다…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수행하는 노동의 성격에 따라서만 차이가 나도록 하고, 산업 유형이나 기업 규모, 기업의 이윤율 등에 좌우되지 않도록 한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노동 배제적 경영 방식은 착취 관계와 함께 종식되며, 노동자와 경영자가 동반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는 공동 결정제를 실시하되, 노동자와 그 대표자가 모든 권한과 책임을 맡는 자주 관리를 지향한다.
완전 고용 보장, 단체행동의 완전한 자유, 기업의 이윤율에 좌우되지 않는 임금 수준 보장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민노당의 지향은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한참 전에 잊혀진 사회주의 체제 선전 문귀를 떠올려보면 이것이 어떤 발상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이는 노동자와 그 대표자가 모든 권한과 책임을 맡는 자주 관리를 지향한다는 대목을 보면 민노당의 지향이 무엇인지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민노당은 1980년대 운동권의 지향과 정서를 온전하게 견지하고 있는 정통 계승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1980년대 운동권의 계승자라는 이미지는 민노당의 커다란 자산 중의 하나 일 것이다.
1980년대 운동권 대오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열린우리당,민주당,한나라당의 중진혹은 소장개혁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 상당수도 있었고, 나 역시 그 대오에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민노당의 지향에 대해 거의 동의하지 않지만(신자유주의의 주구로 비난 받고 있으니), 실사구시에 게으르고 피해의식이 가득한 한국 보수세력의 눈에는 민노당과 노무현의 엄청난 차이가 보일리 없다.
어쨌든 민노당은 부패무능한 수구꼴통들의 행태에 진저리치며, 사이버 공간에서 행동력이 강한 20~30대와 집단적 이해관계를 강하게 의식하는 일부 노동.농민.빈민층과 대의에 과감하게 헌신하던 운동권에 대한 부채의식이 약간 있는 수백만386들에게 그 정서적,이론적 영향력은 그 득표율의 몇배는 족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민노당적 지향과 정서는 김대중/노무현의 주요지지층으로 하여금 이들 정부를 ‘외세와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정권(신자유주의 정권)’으로 보게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선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노무현 지지도가 대선때에 비해 1/3수준으로 급락한 것은 그의 실용주의적 정책들(한미동맹의 중요성 강조, 이라크 파병, 자유무역협정,투자협정등 개방화 정책)을 극단적으로 폄하한 민노당류의 지향과 정서가 지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1980년대 운동권의 지향과 정서가 현실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현상은, 구 운동권의 극적인 분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보수세력들의 반김대중/반노무현 정서를 더 극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정말 민노당이 중심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황당한’ 지향과 조갑제가 체현하고 있는 한국 보수세력의 극도의 피해의식 및 지적 게으름이 부딪치면서 터져나온 것이 시대착오적인 이념 논쟁 일 지 모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둘러대면서 이루어진‘대통령 탄핵’및 ‘탄핵찬성시위’도 근원적으로는 민노당이 주도하는 ‘착시’ 현상(반미, 반시장, 반개방,반자본주의 지향이 한국 사회의 주류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보수 정치 지도층의 몰염치성과 저열한 전략전술 감각도 빼 놓을 수 없겠지만…
하여간 필자는 민노당 강령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고, 반미, 반시장, 반개방,반자본주의 지향이 역사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지지자들은 왕년에 운동권을 했다는 놈의 이런 인식자체가 더 경악스런 일 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는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대화.토론을 하고, 유권자의 심판을 통해 해결할 문제일 것이다. 당을 지지하고 반대함에 있어서 막연한 이미지가 아니라, 강령과 그것을 구체화한 공약이 기준이 되는 것은 한국 정치 발전의 관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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